화폐타고 세계여행 | 냉전의 유산, 내전의 광풍 … 라오스 2018년 9월호
화폐타고 세계여행 18
냉전의 유산
내전의 광풍
라오스
시나씨 알파고(Şinasi Alpago) / <하베르코레> 대표
올 상반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 시킨 남북, 북·미정상회담으로 연일 매스컴에 남·북·미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뜨겁다. 아울러 이 관계의 기저에 깔린 역사 속에서 숨 쉬고 있던 공산주의라는 키워드도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 이후 많은 공산권 국가들이 잇따라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했지만, 북한 및 몇몇 국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산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인도차이나반도에 위치한 라오스도 그중 하나로 한반도에 위치한 남북한과 비슷한 역사를 거치기도 했다. 1953년 열강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달성했지만 이후 22년간 국내정치가 이념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의 국제정치 냉전 구도의 전유물이 되었다는 점은 어쩐지 낯설지 않은 맥락이다.

라오스 5만킵(kip)
언론에서 자주 다뤄지지 않아서 생소할지 몰라도 라오스는 공산주의 국가다. 라오스는 중국과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영향을 받아 1975년 본격적으로 공산주의를 택했다. 하지만 선택이라기보다는 아픈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 과정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 라오스 화폐 5만킵(Kip) 뒷면에 보이는 대통령 궁전이다. 이 궁전은 건립 당시 왕을 위한 것이었지만 완성된 궁전을 실제 사용한 사람은 대통령이었다. 즉 현재 라오스는 라오스 왕국의 후신이다. 라오스 왕국은 1975년 공산 혁명으로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태국이나 캄보디아가 2018년에도 왕국인 것과 달리 라오스 왕국이 1975년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 사연은 무엇일까?
탄압 받던 ‘붉은 왕자’ 수파누봉, 초대 대통령으로

라오스 2만킵(kip)
예전 라오스의 영토에는 란쌍(Lan Xang) 왕국이 존재했다. 란쌍 왕국의 첫 수도는 루앙 프라방(Luang Prabang)이었다. 하지만 라오스의 역대 훌륭한 왕으로 꼽히는 셋타티랏왕(Sethathirat, 1547~1571)은 비엔티안(Vientiane)으로 수도를 천도하고, 그 명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2만킵 앞면에 보이는 ‘호 프라케오’(Ho Phra Keo) 불상 보존각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훗날 이 불상은 해당 시대를 대표하는 심볼이 되었다.
한편 1707년 란쌍 왕국은 분단되고 4개의 왕국이 생겼다. 그중 하나인 루앙 프라방 왕국이 현대 라오스의 조상으로 볼 수 있다. 지속된 전쟁과 내부 분열로 루앙 프라방 왕국의 국력은 매우 약하였고, 중국과 태국 등 외부 위협을 받다가 1899년 라오스에 진출한 프랑스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이어 1949년에는 프랑스 지배 아래 라오스 왕국이 수립됐다. 이 왕국은 한때 프랑스의 영향력으로 루앙 프라방 왕국의 영토는 물론, 태국에게 빼앗긴 란쌍 왕국 영토 일부를 회복하기도 했었다.
1953년 라오스 왕국은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독립했고, 자립의 새 역사를 쓰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렇지만 라오스에는 또 다른 정치적 격변이 있었다. 바로 공산주의의 도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인도차이나 지역에서는 서양 식민지 총독부들의 약탈로 인해 공산주의 이념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가 라오스의 독립을 승인한 배경에는 이 지역을 공산화 위협 속에서 통치하는 것보다는 친서양 정책을 펼쳐나갈 왕을 두는 것이 오히려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속셈의 반대편에는 프랑스와 왕국 정부에 거센 저항의 뜻을 가진 인물이 있었다. 라오스 독립에 큰 기여를 한 그 인물은 바로 ‘붉은 왕자’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라오스의 지도자 수파누봉이다.
수파누봉은 루앙 프라방의 마지막 부왕이었던 보운콩의 세 아들 중 한 명으로 이복동생과 달리 어머니가 평민 출신이었다. 1950년 이후 라오스 왕국 정부는 국내 좌익 정당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큰 탄압을 받았던 정치인 중 한 명이 바로 수파누봉(Souphanouvong, 1909~1995)이었다.
프랑스와 베트남에서 유학했던 수파누봉 왕자는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좌파단체인 파테트라오(Pathet Lao)의 지도자가 됐다. 국회의 정치적인 틀 안에서만 투쟁했던 수파누봉은 1959년 체포되는 등 일련의 사건을 경험한 이후 결국 폭력적인 방식의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이후 1975년까지 계속된 내전이 끝나면서 공산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았고, 라오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됐다. 왕정의 폐지로 수파누봉은 새로 탄생한 국가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라오스 2천킵(kip)
라오스 화폐를 보면 알겠지만 모든 라오스 화폐에는 오직 한 사람의 초상화가 있다. 의아하게도 그는 수파누봉이 아니다. 라오스 초대 총리 카이손 폼비한(Kaysone Phomvihane)이다.
라오스 내전 시절에는 파테트라오와 함께 공산주의를 내세운 강한 세력이 하나 더 있었다. 라오인민혁명당(LPRP)이다. 뿌리를 찾아보자면 라오인민혁명당은 호찌민의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라오스 부서였다가 파테트라오와 연대했다. 처음에 조직으로 움직였던 라오인민혁명당은 1975년까지 파테트라오를 통해 활동해 왔다. 현재 라오스 집권당인 라오인민혁명당의 초대 정당 서기장이 바로 카이손 폼비한이다.
완전한 친베트남 정책 펼친 카이손 폼비한, 국부 위상 지녀

라오스 10만킵(kip)
폼비한은 수파누봉 대통령 시절은 물론 후대 대통령 재임까지 모든 시기에서 실세였다. 1992년 사망할 때까지 라오스의 실권자였던 폼비한을 둘러싼 여러 가지 루머가 있었다. 예컨대 라오스 사람들은 폼비한을 라오스와 베트남의 혼혈로 보고 있지만, 그가 완전히 베트남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여하튼 어느 민족이었는지를 떠나 그가 완전한 친베트남 정책을 펼쳤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현대 라오스에서 폼비한의 위상을 알고자 한다면 10만킵을 보면 도움이 된다. 1989년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허용한 라오스는 특히 불교 문명 애호가들에게는 매력적인 나라다. 그러나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불교 사원만큼 인기 있는 또 다른 관광지는 카이손 폼비한 기념관이다. 베트남의 지원으로 지어진 이 거대한 기념관만큼 라오스에서 인물 중심적인 건축물은 없다. 따라서 오늘날 라오스의 국부는 카이손 폼비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