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공동이익 향한 인내와 노력 … 새로운 평화의 출발선에서 2018년 11월호
포커스
공동이익 향한 인내와 노력
새로운 평화의 출발선에서
한스 모드로(Hans Modrow) / 전 동독 총리
한스 모드로(Hans Modrow)는 1989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동독의 총리로 재임했다. 1928년생으로 올해 90세인 모드로 전 총리는 현재 폴란드 영토인 야제니츠(Jasenitz)에서 출생, 1942~1945년 국민돌격대 소속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된 이후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SED)에 입당했다. 이후 SED에서 선전국장, 중앙위원, 정치국원을 거쳐 SED의 후신 민주사회당(PDS) 부당수에 오르고 1989년 동독의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이후 독일연방 하원의원과 유럽의회 의원 등을 거쳤다.
모드로 전 총리에 대해서는 과거 그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노선에 동조했던 사례 등을 기초로 SED 내 개혁성향을 가진 정치가로 평가하는 시각이 대다수다. 동독의 몰락을 막기 위해 동독 내 민권운동가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야당의 대표를 무임소 장관에 임명하는 등 실제로 재임 중에 이념과 정책적 반대 진영과도 원활한 소통을 위해 노력한 것과 함께 1990년에는 동독에서 주거건물토지 구입을 가능하게 한 일명 「모드로법」을 통과시키며 현실주의적 사고를 정책화하는 데 역량을 갖춘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모드로 전 총리가 지난 9월 16~19일 한국을 방문했다. 방한 직전에는 북한 이수용 노동당 부위원장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독일통일에 대한 과정과 평가에 대해 상당부분 서독의 시각을 통해 들여다봤지만 통일의 뒤안길로 사라진 과거 동독의 전 총리가 들려주는 통일 이야기도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 모드로 전 총리의 방한 기간 중 강연 내용을 게재한다. 그의 방한 기간 수행과 통역을 전담한 이봉기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정리했다. ※편집자주
우리가 독일통일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대부분 1989년 가을부터 1990년까지를 언급하게 된다. 이 시기에 발생한 사건들의 정확한 전개와 사실들에 대해 소개해보면, 우선 1989년 여름에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동서독 간 국경 개방 요인이다. 국경 개방은 독일로부터 이뤄진 것이 아니라, 서독으로 가려는 수천명의 동독 주민들의 압박에 직면한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로 가는 국경 철조망을 제거하면서 발생했다. 이로써 바르샤바조약기구 참가국들의 공동약속이 헝가리가 국경을 개방함으로써 파기에 이른 것이다. 부카레스트에서 열린 바르샤뱌조약기구에서 이 문제를 다뤘어야 했는데, 당시 동독 당서기였던 에리히 호네커는 병중이었다. 권력의 공백이 있었기에 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이다.
호네커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지도부의 모든 희망은 동독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식에 고르바초프를 초청하여 양국 간 긴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향하게 되었다. 희망대로 고르바초프는 기념식에 참석하여 공개 행사에서 매우 우호적인 언급을 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통일당의 정치국원들과 비공개회의에서 유명한 말을 한다. “늦게 오는 자는 삶이 벌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삶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만 벌한 것이 아니라 늦게 온 고르바초프 역시 벌하였다. 이제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데, 호네커가 더 이상 당서기에 있지 않고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부가 다른 지도자를 선출한다면, 동서독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10월 18일 호네커가 물러나고 그는 에곤 크렌츠를 새로운 당서기장으로 제안한다. 호네커가 후계자를 임명하였기에 호네커는 몰락한 것이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호네커 정책의 지속으로 볼 수 있고 그가 후계자를 통해 영향력을 계속 미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동서독 통일의 과정에 ‘조약공동체’가 있었다
에곤 크렌츠는 10월 18일 취임 연설에서 ‘변혁’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전 지도부는 그대로 자리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변혁을 한다고 선언했는데, 과연 그들이 스스로 그러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에곤 크렌츠는 11월 1일 소련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나 현 상황에서의 동독 문제점, 안정, 발전에 대해 회담을 나눈다. 그러나 과거의 구조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지도부와 정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11월 7일 동독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족의 압력이 커지자 정부는 사퇴를 하게 된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회의가 11월 8~10일 개최되고 당시 총리였던 빌리 슈트프와 그의 정부가 물러나게 되어 새로운 총리와 정부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인에게 총리 제안과 함께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임하였다. 새로운 정부의 구성은 11월 17일 이루어지게 되었다. 본인은 의회에서 새로운 정부 구상에 관한 정부 정책을 설명하면서 양독 관계에 대해 새로운 차원의 접근을 제안하게 되었고 이러한 구상을 ‘조약공동체’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제안은 소련의 동의를 받았고, 서독의 콜 총리는 11월 25일 정부 정책 설명에서 이에 동의한 가운데 동서독 간 조약공동체 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콜 총리는 11월 28일 10개항의 프로그램을 발표하는데 제4항이 바로 조약공동체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독일통일 문제가 아직 현실적인 정치적 현안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확신했고 소련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미국이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 개입하게 된다. 12월 2~3일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부시가 만나 평화와 안보에 대하여 논의하였고 어느 쪽도 독일통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12월 4일 모스크바에서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의가, 브뤼셀에서는 나토 정상회담이 열려 몰타정상회담의 결과를 설명한다.
나는 동 회의에서 별도로 고르바초프와 양자회담을 하였는데 고르바초프는 내게 말하기를 “동독은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동독이 안정을 찾도록 모든 것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동일한 내용에 대해 12월 7일 소련 공산당 지도부 회의에서 재차 언급한다. 그러나 당시 내가 받은 느낌은 소련 스스로가 혼란 속에 빠져 있어서 더 이상 동독을 지탱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1990년 1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재차 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 외상 그리고 주요한 정치 인사들을 만났다. 여기서 우리는 독일통일이 이제 정치적 현안이 되었다고 상호 이해하였다.
조약공동체는 통일로 가는 과정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안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소련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에 의해 결정되었다. 통일까지 3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하였는데, 첫 번째 단계는 조약공동체이며, 주권국가로서 상호 공동의 이익을 결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3년 정도 지난 후에 연방국가를 만드는 것으로 대외정책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1차적으로 공동의 법률적 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에 약 2년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나서 세 번째 단계로 통일국가를 완성하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의 현실적 상황을 보게 되면, 유사한 문제들을 보게 된다. 한국을 방문하기 직전에 북한 이수용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인 이수용의 초청으로 방북하였다. 이수용 부위원장은 북한의 국내 정책에 대해 세 가지를 설명하였다. 첫째, 주체사상을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북한 주민들이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의 이데올로기로 함께 결속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북한이 새롭고 획기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해야 하며 이러한 북한의 경제도약이 통일을 위한 노력을 막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더불어 남한은 북한이 계속 퇴보 상태에 머무르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며 남쪽에서도 북한 주민의 삶의 조건이 악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즉, 통일 과정에서 북한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면, 그것은 남북이 함께 통일로 가는 것이고 남한에 경제적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을 줄이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셋째, 통일은 남북 주민들의 문제로 남북 주민들이 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통일로 가야하는지, 통일의 주요 과제들이 무엇인지를 묻고 설명하였다.
평화와 안보 … 전쟁 재발 방지 위해 모든 노력 쏟아야
여기서 나의 의견을 덧붙이자면, 남한은 계속 대북 평화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상대의 주권을 존중해야 하고, 각국은 자신의 이해를 스스로 확인하고 발전시켜야 하며, 통일에 도달하기 위해 어떠한 단계를 가야만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이 주장하는 평화와 안보가 핵심적인 사안이며, 이를 통해 전쟁을 피해야 한다. 지난 1985년 나와 북한 김일성 주석이 평화와 안보에 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당시 그를 유럽 방문 중에 만났고 이후 평양으로 나를 초청하였을 때 다시 만나기도 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한민족에게 가장 처참한 경험은 1950~1953년까지의 전쟁이라고 강조하였고 앞으로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은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고 한 바 있다.
신뢰와 책임에 대해 서로 공유하는 것은 남북한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문 대통령은 2017년 여름 베를린 선언에서 이러한 주제에 대해 설명하고 어떻게 노력할지를 언급하였다. 당시 나 역시 연설에 초청을 받아서 참석했는데 독일이 한반도와 같은 역사와 운명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 및 통일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베를린 선언을 들을 기회는 있었지만 이를 인쇄된 활자로 읽지는 못해 중요한 정책의 사고와 강조점이 무엇이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남북한은 현재 발전을 위한 새로운 지점에 서 있다. 결실을 이루기 위한 출발선이지만 이러한 과정은 홀로 즉흥적으로 진행될 수 없다. 인내와 노력 그리고 상대에 대한 공동의 이익을 확보해 나가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처럼 조약공동체에 도달하려면 모든 협상의 단계에서 각각의 문제에 대해 정부 간 긴밀한 결정이 필요하다. 협상과 대화를 위해 개성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한 것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이산가족들이 다시 만나고 이러한 것들이 정례화되는 것이 모두 새로운 시작의 징표다. 정부 간 협상이 중요하고 덧붙여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에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책이 오락가락해서는 안 된다.
남북, 정책의 지속성 토대 위에 공동이익 찾아내야
과거 박근혜 대통령은 다른 정책을 운용하였고 이제 문 대통령은 그 시대와 전혀 다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건설적인 과정은 이제 시작된 것이다. 이는 분단국의 운명인 통일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과 평가를 한다. 단 하나의 시각만 가진다면 설자리를 잃게 된다. 연구를 해야만 하고 다양한 것들의 관계를 분석해야만 한다. 만약 북한을 적으로만 본다면, 어떠한 진전도 없을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화는 의미가 없게 된다.
1953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났을 때 평화협정이 아닌 정전협정만 체결되었다. 이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4대 승전국이 생겨났고 유럽인들은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하였다. 아시아에서 일본에 대한 전쟁의 종식은 식민주의로부터 해방이었고, 일본 점령의 종식이었다. 1950~1953년의 한국전쟁은 한국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기도 했다. 이러한 분단 역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현재의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항상 유념해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1950년의 한국전쟁은 나에게는 매우 마음 아픈 일이었고 이후로 남북한 문제는 나의 정치적 삶과 오랫동안 맞닿아 왔으며 현재도 연계되어 있다. 현재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의 이은정 교수가 주최하는 많은 학술회의에 참석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계속적 관심을 갖고 의견도 나누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쟁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고 파시즘 역시 다시 횡행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정리 / 이봉기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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