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동네 리얼스토리 | 내 이름은 오봉녀 2018년 12월호
윗동네 리얼스토리 94
내 이름은
오봉녀
이지명 / 국제펜(PEN)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
2007년에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A씨. 그녀는 지금도 남한 어디선가 살고 있을 어머니의 가족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11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의 가족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의 가족은 아마도 한국전쟁 때 모두 저 세상에 간 것 같다고 했다.
탈북하기 5년 전, 그녀의 아버지도 북한에서 사망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휴전선 부근인 강원도 김화 땅에 묻힌 어머니의 묘소에 엎드려 통곡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A씨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남쪽 지주 출신의 과거 지우려 차명순으로 살았다
한국전쟁 때 남으로 향하던 길에서 아버지가 만난 한 남한 여성이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다. 강원도 양구의 한 지주집의 장애를 가진 아들에게 빚값에 팔려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하게 된 어머니는 전쟁이 터지자 식구들을 따라 피난을 가지 않고 집에 남아 있다가 하룻밤 묵는 인민군 병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총상으로 보름간 아버지는 어머니의 간호를 받게 되었고 이 일로 두 사람 사이에 남다른 감정이 싹트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전쟁이 끝나 제대하여 고향집으로 간 아버지는 먼저 온 임신한 어머니를 만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엄청 반가웠지만 여자의 신분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마침 온 가족과 함께 폭사한 동네 이웃 차명순이라는 여자의 이력을 빌려 신분을 위장한 다음 고향을 떠났다.
어머니는 이후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아 모두 번듯하게 키워놓았다. 한국전쟁 때 낙동강 전선까지 나왔던 전쟁 노병인 아버지의 공적으로 인해 세 아들은 모두 인민군 고급군관으로 출세해 그들 가족은 남부럽지 않는 삶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노년에 접어들자 어머니는 집을 떠나 강원도 김화에서 인민군 부대 여단장으로 있는 맏아들 집을 늘 찾아 틈만 나면 남쪽 땅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 칠순 회갑잔치를 맞은 어머니는 세 아들만 불러 앉히고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혔다.
“나는 고향이 남강원도 양구이고 본명은 오봉녀다. 아버지를 만나 북에 들어와 평생을 차명순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내 본명을 찾고 싶구나”라고 말했다. 순간 세 아들은 불에 덴 듯 펄쩍 뛰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어머니의 진짜 신분이 밝혀지면 세 아들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신분을 중시하는 북한 체제에서 그것은 말도 꺼내지 말아야 할 중대 비밀이었다. “어머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머니의 본명을 찾는 것이 세 아들의 생명보다 더 귀중합니까? 어머니로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지만 어머니라고 왜 그런 실태를 모르고 꺼낸 말이랴. 스무 살에 떠나온 고향을 칠순이 되도록 마음속으로 그려야만 했던 안타까움, 아버지가 지어준 오봉녀란 버젓한 이름도 잊고 남의 이름으로 한생을 마쳐야 하는 말 못할 안타까움이 아마도 그런 말을 꺼낸 계기가 됐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들들에게는 어머니의 그 말이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A씨는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저밖에 모르는 오빠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아버지는 세 아들을 산소에서 내려 보낸 다음 무덤에 엎드려 대성통곡했다.
아들들에게 냉대를 받자 어머니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를 붙들고 “여보, 내가 죽은 후 무덤의 묘비에라도 내 본명을 써 주면 안 되겠소? 훗날 통일이 되면 남쪽에 있는 내 친정에서 누가 와서 봐도 오봉녀란 이름을 찾을 게 아니겠소. 그러니 제발 좀 부탁합니다”라고 간절히 말했다고 한다.
“묘비에라도 본명을 써 주면 안 되겠소?”
그러나 아버지는 묘비에마저 오봉녀라는 이름을 적어 넣지 못했다. 그것이 밝혀지면 세 아들이 철직되고 언제 어디로 끌려갈지 알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차명순이란 묘비를 안고 아버지는 몸부림쳤다. 전쟁 노병으로 본인도 한 자리했고 사람들에게 떠받들려 살아온 아버지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내의 마지막 유언조차 들어줄 수 없는 처지였다.
그 이후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A씨는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한국에 가서 어머니의 가족을 찾아 김화 땅에 묻힌 묘소도 알려주고 차명순이 아닌 오봉녀의 묘라는 사실도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언제면 A씨가 어머니의 가족을 찾을 수 있을지, 기약 없는 길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분단 70여 년간 쌓인 한민족의 슬픔이고 가셔낼 수 없는 한이 아닌지 생각한다.
사람이 왜 세상에 태어나 부모가 지어준 제 이름 석자마저 밝히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남쪽에서 들어온 사람이란 그것이 죄가 될 일이 아니건만 왜 북쪽에서는 그마저 생사를 가를 치명적인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과연 그 답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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