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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전면적 생사확인부터 합시다” 2014년 3월호

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마지막회)
이상철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위원장
“전면적 생사확인부터 합시다”

TS_201403_22 지난달 20일 남북한의 헤어진 가족들이 만나 60년 동안 허락되지 않았던 혈육의 정을 나누었다. 2010년 10월 상봉을 마지막으로 3년 4개월 만에 성사된 이번 만남을 위해 누구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온 이가 있다. 바로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이상철 위원장(62).

서로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짓는 상봉 장면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부모님은 1949년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평생을 지켜오던 황해도 평성을 떠나오셨다. 이 위원장이 어려서부터 이산가족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남에 자리 잡은 부모님은 이북의 고향과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향우회에서 마음을 달래셨다. 아들의 손을 꼭 잡고 향우회를 향하던 아버지 덕분에 그의 주변에는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늘 전해졌다.

‘내가 만약 부모님과 떨어졌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이들의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는 길은 통일밖에 없었다. 그는 그때까지 이분들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점차 아버지가 전해주는 평성이,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북이 고향처럼 다가왔다. 더욱이 북에 계신 친척들을 생각하면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1982년 청년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고, 1990년도에는 이북도민청년회장이 되어 실향민들을 위해 앞장섰다. 청년회장이 된 그는 이북 출신들이 고향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에 이북 출신들의 정체성을 담아 『청년헌장』을 제정하기도 했다.

아들 손 꼭 잡고 향우회 향하던 아버지

당시는 독일 통일의 열기가 한반도까지 불어 닥치던 시점이었다. ‘통일은 언젠가 될 것이다. 이때를 대비해야겠구나.’ 동서독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보며 훗날 이북으로 가 해야 할 일이 많음을 깨달았다. 처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접하는 북한 주민들에게 이질감 없이 정책이 투입될 수 있도록 남과 북의 매개체가 되어줘야 한다. “다른 사람보다 고향사람들이 향토재건사업에 나선다면 의미도 있고, 학습 선도효과도 더욱 크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에는 20년 전 처음 청년회장이 되던 그날의 열정이 살아있었다.

이렇게 통일을 고대하며 그는 2007년부터는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일하고 있다. 그가 위원장으로 크게 역점을 두고 있는 사안이 있다. 바로 이산가족의 전면적 생사확인이다. 현재 국제적십자사에서는 떨어져 있는 가족을 위한 ‘심인사업방법’으로 4단계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전면적인 생사확인-서신교환-상호방문-자유의사에 따른 재결합이 그것이다. 이 방법을 우리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더라도, 반드시 전면적인 생사확인이 전제되어야만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재 우리 이산가족 문제 접근은 일회성 상봉행사에 그칠 뿐, 근본적인 해결은 상봉행사를 시작한 1988년 이래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약 2천여 가족이 상봉을 통해 진한 감동을 전해주었지만, 그 가족들은 다시 기약 없는 이별에 처해졌다.

다행히 지난 2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고령의 이산가족들이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상봉을 기다리는 지금의 방식은 한계가 있다.”며 “남북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는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생사확인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2월 18일 “이산가족이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는 근본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며 정례상봉 의사를 시사했다. 이 위원장의 오랜 숙원에 대해 대통령의 의지가 표명된 만큼 불투명했던 앞날에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하다.

이산가족 문제는 남북한의 의지가 담겨야 한다. 전면 생사확인부터 차근차근 시작한다면 문제해결은 물론 남북관계의 빗장을 풀어가는 방안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간혹 그에게 북한의 전산 시스템이 좋지 않아 전면 생사확인이 힘들지 않겠냐는 반문을 해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위원장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지금까지 상봉 추이를 지켜볼 때, 북한에 상봉자 명단을 주면 항상 한 달 안에 70~80%의 대상자를 찾아옵니다. 결코 그들이 찾기 쉬운 명단만을 준 건 아닐 텐데 말이죠.” 즉 북한의 사정에서 현실적으로 상봉 가능한 명단은 항상 찾아왔단 얘기다. 전면 생사확인은 남북이 마음먹기에 따라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다.

지난 2012년 6월 6일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는 유엔 본부 앞 함마슐드 광장에서 남북 이산가족문제에 국제사회의 개입을 요구하는 피켓시위를 진행했다.

지난 2012년 6월 6일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는 유엔 본부 앞 함마슐드 광장에서 남북 이산가족문제에 국제사회의 개입을 요구하는 피켓시위를 진행했다.

“이산가족 문제, 국제사회와 함께 풀어가야”

이 위원장은 남북의 전면적 생사확인이 당장 이루어 질 수 없다면, 그 전까지 19차례 상봉한 이들을 대상으로 2차, 3차의 화상 만남이 이어질 수 있는 방안도 제시한다. 현재 화상상봉 방식은 6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대면조차 하지 못한 이들이 간접적으로 만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실효성에 의문을 품는 것이다. 차라리 기존 상봉했던 가족들이 그간의 안부를 묻고 교류를 지속해가는 방안이 현실적으로 그들을 위해 훨씬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이산가족은 인도주의의 문제가 아닌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또한 그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제시를 했다. 평생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가족을 강제로 떨어뜨린 것은 기본적인 권리를 분단에 의해 박탈당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도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에서 하고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산가족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지면 인도주의적 접근보다 구속력이 강해지고 국제적 압박도 유도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의외로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 둔감하고 그 심각성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이산가족이 평생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아픔을 겪고 있다고 설명하면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하면 되잖아요?”, “왜 편지를 보내지 않죠?”라고 되묻는다고 했다. 마치 배고픔을 겪는 인민들에게 왜 빵을 먹지 않느냐고 되묻는 것과 같은 원리이며, 그만큼 이산가족 문제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산가족 문제는 남북한의 의지에 국제사회의 힘이 더해져야 더욱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하던 당시 유엔은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여 협정문에 서명을 했다. 그는 감사하게도 이후 유엔과 국제사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분단과 이산의 현실에 서명한 꼴이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유엔이 결자해지의 자세로 적극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할 책임 또한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이산가족상봉은 뜨거운 감동을 선사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저 가족이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잠깐의 만남을 허락받았을 뿐이다. 그 누구도 다시 만나거나 같이 살아가는 일상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었다. 60년을 기다려온 시간이 고작 11시간의 짧은 만남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 그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볼 때마다 뭉클하게 끓어오르는 가슴을 느끼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움도 느낀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약 70만명의 이산가족 1세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상봉신청을 하기 시작한 1988년 이래 12만9천여 명이 가족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들 가운데 이제 7만1천명만이 살아남아 다시 만날 날을, 가족이란 울타리로 다시 살아가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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