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사 | 남북협상 일꾼 이봉조 차관을 보내며 2014년 4월호
추도사 | 남북협상 일꾼 이봉조 차관을 보내며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이 지난 3월 15일 오후 타계했다. 통일을 적극 준비해야 할 시기에 귀중한 역할을 할 인재를 이대로 떠나보내기가 너무도 아쉬워 다시 그를 생각해 본다.
내가 이봉조라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1980년 초가을, 통일원에서였다. 당시 통일원은 지금과 달리 행정보다는 정책개발을 주로 하는 연구기관이었다. 나는 1977년 가을 통일원에 들어가서 3년차 연구관으로 일하고 있을 때 3년 후배 그룹이 4~5명 새로 들어왔는데, 그 중 하나가 이봉조라는 27세의 청년이었다. 동기들 중에 키가 제일 크고 머리도 큰, 그리고 경상도 억양이 강한 친구였으며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성격이 시원시원하면 대신 일을 꼼꼼히 하기 어렵다 하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언행은 시원시원하면서도 일은 일대로 치밀하게 했기 때문에 곧 눈에 띄었고, 상하의 신망이 높았다. 그래서 통일원 선배들 중에 “하는 싹수로 보아 이봉조는 장·차관까지 갈 친구야.”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동기들 중에 선두주자였다.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두 번이나 지내고, NSC 안보정책조정실장 이후, 통일부 차관으로 일을 했다. 그동안 남북관계를 개선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다. 통일정책 개발, 남북협상 등 매사에 막힘이 없이 척척해냈다. 특히 남북대화 시 밤샘 협상에서 우리 측 입장을 관철시키는 데 능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시절 청와대 통일비서관이었으니 그가 남북관계에서 어떤 공로가 있는지 굳이 설명 안 해도 되는 일이다. 이 차관이 통일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선배들이 내렸던 인물평이 맞았다는 얘기다.
그는 통일원 공무원으로 박봉에 쪼들리면서도 후배들을 도왔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그렇게 하지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는 의인이었다. 그는 유능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진지하고 성실했다. 그런 성품과 자질이 통일문제에서 중요한 역할로 발현되었다.
비교적 일찍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쫓아갔지만, 그는 이미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30년 넘게 친하게 지내던 선후배 사이인데다 요즘 같은 고령화 시대에 60년을 못 채우고 떠나다니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이 차관과 영영 이별을 고하기보다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그가 이생에서 못다 이룬 꿈, 통일이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그때는 통일된 조국의 번영과 발전에 앞장서는 일을 하리라고 믿는다. 그는 한 숨 자고 난 뒤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성격은 시원시원하면서도 일만큼은 꼼꼼하게 처리하고, 약자를 돕고 보살피는 그런 사람으로 다시 만날 것이다. 이봉조 차관! 일단 잘 가시오. 그러나 갔다가 곧 돌아오시오. 그래서 우리 또 만나 같이 일합시다.
정세현 / 원광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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