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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북한에 민본(民本)을 묻다 2014년 7월호

포커스 | 드라마 〈정도전〉
북한에 민본(民本)을 묻다

요즘 사극 <정도전>의 인기가 뜨겁다. 주변에 이 드라마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듯싶다. 최근에는 소위 ‘퓨전사극’이라는 형태가 풍미하면서 사극 시청인구의 저변확대에 기여한 바가 컸지만 사극 특유의 ‘묵직한 맛’이 많이 퇴색해가던 차였다. <용의 눈물>이후로 정통 사극의 부활 기미가 보인다.

정통사극의 맛을 북한주민들도 공감하는지 최근 북한지역에서 <정도전>에 대한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많은 북한주민이 <정도전>을 시청하는 것을 의식한 듯 북한당국은 특별지시로 이름을 콕 짚어 “남조선 드라마 <정도전>의 불법유통을 철저히 차단하라”는 이례적인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하긴 드라마 <정도전>에 담겨있는 역성(易姓) ‘혁명성’이 북한당국이 말하는 주체(主體) ‘혁명성’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낸다고 했던가. 500년 전에 죽은 정도전이 북한체제를 놀래 킨 격이다.

<정도전> 보면 엄벌 … 역사를 두려워하는 북한당국

드라마 <정도전>은 부패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을 건국하여 새로운 국가체계를 수립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14세기 말 당시 고려사회의 부패와 유랑걸식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현재 북한체제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와 현실 간의 오마쥬는 곧바로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고 ‘역성혁명’을 꿈꾸는 ‘정도전’의 추종자들이 등장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이다.

북한당국이 드라마 <정도전>을 싫어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권과 왕권의 조화, 그리고 백성과 농민을 중시하는 국가를 이상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민본주의와 민주정의 맹아적 단계를 구상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후일 제1차 왕자의 난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상적 정체로 추구했다. 드라마는 정도전이 조선건국의 가장 큰 공로자인 이방원을 제쳐두고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석을 선택하는 원인도 왕권중심의 통치철학을 갖고 있던 이방원에 대한 견제로 해석하고 있다.

사실 국내에서 인간 ‘정도전’에 대한 열풍이 분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정도전’ 열풍에 불을 지핀 것도 사실상 2000년 이후 사극을 통해서였다. 정도전의 저술로 알려진 <삼봉집>이 대형서점에서 일반교양서로 팔리기 시작한 것도 그 때 즈음이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현재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 역으로 연기하고 있는 유동근이 지난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인기리에 방영된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 이방원 역을 맡아 열연했던 적이 있고 16년 뒤인 현재 이성계로 변신했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용의 눈물에 같이 출연했던 안재모는 세종 충녕대군에서 이방원으로 ‘승격’되었다. 둘 다 부자관계를 이어가며 수직상승했다. 또한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의 의동생인 이숙번 역을 맡았던 선동혁은 <정도전>에서는 이성계의 의동생인 이지란 역으로 분했다. 배역부터 사극 <용의 눈물>을 계승했다.

드라마 <정도전>의 극중 전개에서 최대 고비는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과 이성계의 3남인 이방원과의 갈등관계다. 이른바 왕통을 둘러싼 갈등이다. 당시 이성계는 향처(鄕妻)인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큰 아들 방우 등 여섯 아들을 두었고 경처(京妻)인 신덕왕후 사이에서 방석 등 아들 둘을 두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신덕왕후는 첩이 아니라 신의왕후 한씨와 동등한 권한을 갖는 경처였기 때문에 방석으로의 왕위승계 결정이 가능했다.

하여간 당시 조선개국의 일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비롯한 공신록까지 삭제당하는 설움을 겪었던 이방원은 후일 태종에 오르면서 정적들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시행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덕왕후로, 이성계가 사망하자 신덕왕후의 무덤에 있던 석조물들을 들어내서 청계천의 시작점인 해정교의 석재로 사용했다. 사람들이 모두 밟고 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그만큼 신덕왕후에 대한 원한이 컸다. 두 번째가 바로 정도전이다. 그래서 조선을 설계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역사의 뒤켠으로 물러나 어둠 속에 있다가 조선 말에 이르러서야 그 공적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왕조정치 복수극의 일면이다. 그런 면에서 북한체제는 닮은 부분이 많다.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백성이다”

북한 동포들이 우리나라 사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극본의 완성도나 재미가 몰입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그런 극적 긴장감을 갖춘 사극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럴까? 단적으로 말해 북한은 역사해석에 대한 도그마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으로 수렴되는 도식화된 역사만 존재할 뿐 시대에 대한 ‘재해석’이나 ‘추론’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경직된 환경에서는 작가의 상상력과 결합된 제대로 된 작품이 탄생될 리 만무하다. 역사적 사실은 현재와 끝임 없이 조우하면서 새롭게 재해석되고 덧칠되면서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한은 역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거의 1930년대 항일빨치산 활동을 중심으로 창작되었다. 그나마 임꺽정이나 홍길동처럼 봉건지배계층의 수탈에 맞선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극 영화를 만들었지만 현재 간부들의 수탈과 봉건적 구조 등의 유사성에 대한 여론 때문에 더 이상 상영하지 않고 있다. 역설적으로 북한당국은 주민들이 역사물을 통해 상상력을 펼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주민들이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지만 사실상 왕조체제인 북한의 현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국가 및 간부들에 의해 자행되는 수탈경제는 그대로 고려 말의 모습이다. 북한 문제를 아는지 모르는지 삼봉 정도전 선생은 극중에서 촌철살인의 명언을 남겼다. “내가 생각한 대의는 아주 평범한 것이네. 백성들 앞에 놓여진 밥상의 평화네.”

서유석 / 북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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