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싶었어요 | “이 한(恨)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14년 9월호
만나고 싶었어요 |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이 한(恨)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현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상임대표를 맡고 있어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장도 함께 맡고 있죠. 대학 졸업 후 1992년에 정대협 간사로 활동을 시작해 1994년부터 사무국장직을 맡았죠. 1998년부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에서 1년, 한국여성재단 사무처장으로 2년 동안 활동하다가, 2002년부터 다시 정대협 사무총장으로 돌아왔고, 2006년부터는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어요.
Q. ‘정신대’와 ‘위안부’, 어떻게 다른지?
A. 정신대(挺身隊)는 글자 그대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것이죠. 의료, 보도 등 여러 분야에서 인력동원에 쓰인 개념이었어요. 즉, 일제가 무상으로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었어요. 그런데 정신대라는 개념은 노동력 동원과 군 위안부 동원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는 것이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이었죠. 일제의 노동동원 형식은 모집(1939~1942), 관(官)알선(1942~1944), 징용(1944~1945)의 단계를 거치면서 점차 강제성을 강화해 갔어요. 일제 강점기 노동력 동원은 법령에 의하지 않은 채 상당기간 시행되다가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어요. 특히 여성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1944년 8월에는 일왕 서명의 칙령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었죠. 그러나 이 령이 공포되기 이전인 1943년 9월 21일자의 <매일신보> 기사에 보면 이미 1943년 9월에 여자근로정신대 제도가 결성되었다고 소개되고 있거든요. 1944년 3월부터는 평양, 포항, 대구, 여수, 목포 등지에서 일본의 공장으로 여자정신대가 집단 동원되고 있었고요.
여성의 근로 동원에 대해서는 공식 제도로, 령으로 확인되는 데 비해, ‘위안부’와 관련한 내용들은 군 문서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되고 있어요. 사실 일본 군인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에서도 나오듯 ‘정신대’와 ‘위안부’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당시 위안소에서 성노예로 일한 여성을 부르는 명칭은 다양했어요. ‘작부’, ‘종업부’, ‘취업부’, ‘예기’, ‘창기’, ‘특종부녀’, ‘접객부녀’ 등의 용어들이 군 문서에 사용되고 있었는데, 1980년 후반부터 19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신대’라고 부르게 된 것이죠.
그러나 ‘정신대’와 ‘위안부’의 개념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죠. 군수공장 노동을 위해 미혼여성을 동원한 제도였던 근로정신대와 군인들의 성적 노예로서 사용된 군 위안부 제도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잖아요. 용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문제제기와 함께 공식 논의가 시작됐죠. 이 두 가지 용어의 개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992년 8월 11~12일, 정대협이 아시아피해국 여성들을 초청하여 서울에서 개최한 ‘제1차 정신대문제 아시아연대회의’부터였어요. 논의 끝에 아시아연대회의는 역사적으로 사용되었던 용어인 ‘위안부’를 그대로 사용하되, 실제로 그 여성들이 사전적 의미로서 ‘위로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함’을 의미하는 위안부였던 것이 아니라, 일본 군인들과 일본군 문서에 의해 ‘위안부’라 명명된 것이므로 따옴표(‘’)를 반드시 붙여 사용하여 일본군 ‘위안부’로 표기하기로 결정했죠. 동시에 영어권에서는 ‘일본군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로 부르기로 했죠.
Q. 정대협 활동에 대해?
A. 정대협은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가정폭력 및 성폭력 반대, 성매매 및 성착취 반대’ 등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던 37개 여성운동 단체들이 1990년 11월 16일에 결성한 조직이에요. 지난 22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통해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생존자)들의 명예회복, 전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 방지 등을 목적으로 삼고, 피해자 복지지원을 포함하여 다양한 국내, 국제연대 활동을 하고 있죠. 가장 주된 활동은 역시 UN 등 국제인권기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인도에 반하는 범죄, 즉 전쟁범죄로 판단하게 하고, 일본 정부에게 사죄와 배상, 책임자 기소 및 처벌을 권고하는 결의들을 채택하게 하는 활동이에요. 세계 각국 의회가 일본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는 활동에도 주력하고 있고요.
실제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연합, 네덜란드, 캐나다 등 세계 많은 나라 의회에서 결의를 채택하도록 했어요. 2000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을 개최해 히로히토 등 책임자들에 대해 유죄판결을 성사시키며 전시 성폭력피해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기준을 만드는 일에 앞장 서 왔어요. 2011년 12월 14일 1천회 수요시위를 맞이하면서 일본대사관 앞 거리를 ‘평화로’로, 그 앞에 ‘평화비’를 세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이 과거 역사청산 운동을 넘어서서 평화운동으로 향해 가고 있음을 선언했고요. 2012년 3월 8일에는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나비기금’을 만들어 모금과 지원활동을 시작해 현재 콩고와 베트남 피해자들에게도 지원되도록 하고 있어요.
Q.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일본의 입장은?

지난 8월 20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시위’가 열린 가운데 학생들이 피해자들을 응원하는 메시지와 함께 일본 정부의 ‘진상규명’과 ‘공식사죄’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A.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유엔의 권고도, 국제사회의 권고도 거부하면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국가의 책임도, 위법 행위였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법적인 책임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4차례에 걸쳐 발표됐죠.
첫 번째는 1990년 6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일본 정부 대표가 ‘위안부’는 일본군이 개입하지 않았고 민간업자가 한 일이었다는 발언을 했고요. 이후 피해자 증언과 옛 일본 군인 증언, 군문서 발견 등이 계속되자 두 번째로 일본 정부는 1992년 7월 6일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1차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위안소의 설치와 모집, 관리와 운영 등에 정부의 관여가 있었다고 인정하였지만 여전히 “강제성은 없었다.”고 부인하며 법적인 책임도 인정하지 않았죠. 대신 ‘보상에 대신하는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밝혔어요.
그로부터 1년 후인 1993년 8월 4일 일본 정부는 이른바 ‘고노담화’를 발표하면서 위안소 설치, 관리, 이송과 위안부 모집 등에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거짓과 강압에 의해 모집된 사례가 있었다는 등 강제성을 인정하였지만 여전히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감언과 강압으로 ‘위안부’를 모집한 사례가 많았다.”는 식으로 책임을 민간업자에게 떠넘기고 법적 책임도 여전히 부정했죠. 이것이 세 번째 입장 발표였어요.
네 번째로 1995년에는 ‘보상에 대신하는 조치’의 실행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을 만들어 민간모금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는데, 피해자들과 아시아 여성들은 단순히 시혜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국민기금을 반대하며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피해자 개인에게 공식사죄, 배상, 실태조사와 전후배상법을 제정하는 등의 포괄적 해결을 촉구했죠.
하지만 일본은 국민기금 사업을 중단하지 않고 강행했어요. 법적 책임을 부정하던 일본 정부는 국민기금 사업 이후, 법적 책임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완료되었고, 국민기금으로 도의적 책임도 다했다고 선전하기 시작했거든요. 더 이상의 진상조사도, 어떤 후속조치도 추진하지 않았죠. 아베 정권이 들어서면서 강제연행을 부인, ‘고노담화’마저 부정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왔어요.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성노예가 아니었다고 부정하고 있죠. 결국 지난 6월 24일 일본 정부는 ‘고노담화’ 검증 결과를 발표하면서 ‘고노담화’에서 인정한 군 개입 인정과 강제성 인정이 한·일 정부 간의 협의결과인 것처럼 발표하면서 그동안 진행해 온 일본 정부의 최소한의 노력마저도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을 자처해 왔어요.
Q. 활동하며 가슴 아팠던 일과 뿌듯했던 일?
A. 아무래도 할머니들과의 관계가 가장 가슴 아프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이 진행된 지난 24년 동안 본인이 피해자라고 공개 증언한 분은 모두 238명이에요. 그 중 현재까지 55명이 생존해 있죠. 하지만, 현재 대부분 90세가 가까운 고령이고 90세 이상도 15명이나 돼요. 일본군 ‘위안부’ 후유증과 노인질환 등으로 건강이 아주 안 좋은 상황이에요. 온 힘을 다해서 가능하면 많은 할머니들이 살아계실 때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써보지만 결국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별다른 해결책 없이 생사의 이별을 하게 될 때, 눈을 편하게 감지 못하고 힘겨워 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때 늘 가슴이 아파요. ‘이 한을 다 어떻게 다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죠.
반면 우리의 노력으로 ‘변화’와 ‘지지’가 확인될 때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에요. 유엔에서 특별보고서가 제출되고 채택될 때, 세계 각국에서 의회결의를 채택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할 때가 그렇죠. 초기에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운 존재라고 여기며 대중 앞에 나오기를 꺼려하던 할머니들이 “우리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며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일본 정부”라는 의식의 변화를 느꼈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우리의 노력으로 ‘변화’와 ‘지지’가 확인될 때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에요. 유엔에서 특별보고서가 제출되고 채택될 때, 세계 각국에서 의회결의를 채택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할 때가 그렇죠.
이동훈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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