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 “눈이 네 개였으면 좋겠다” 2014년 9월호
탈북인 남한사회 정착기 62 | “눈이 네 개였으면 좋겠다”
남한 도서를 처음 본 것은 태국 난민수용소에 있을 때였다. 한국대사관 직원들과 교민 교회에서 한국 신문과 책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이 가끔 들어왔고 책은 전부 성경과 설교, 간증이 실린 것들이었다. 그러다 남한 사람 한 명이 불법체류자로 들어왔는데 <백범일지>라는 책과 장편소설 <예수 그리스도>를 소지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탈북자들이 순서를 정해 그 책을 돌려가며 읽었다. 필자가 유별나게 그 책들을 자자구구 새겨 읽는 바람에 시간이 오래 걸리자 다른 이들의 질타도 받았다.
북한에 있을 때 너무나 책에 굶주려 두 개밖에 없는 눈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남한에 가면 밥도 밥이지만 책을 지겹도록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런데 남한에 살아보니 그야말로 책 바다였다. 쓰레기 분리수거 날이었다.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것 같은 책들이 통에 담겨진 것이 보였다. 이리저리 뒤져보니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았다. 이 아까운 걸 버리다니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골라냈다.
이 때 경비원 어르신이 “그건 뭐하려 그래요?”하고 물었다. “읽으려는데 안 되는가요?” 도둑질이라도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아니, 뭐 볼 만한 게 있으면 가져가든가….” 왠지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후에 알고 보니 어르신이 그것을 폐지로 따로 수매해 용돈에 보탠다는 것이었다. ‘아, 그래서 내키지 않아 하셨구나’ 그 후부터 어르신을 생각해 책을 줍지 않기로 했다.
도서관이 어딘지 알아보니 집근처에 평생학습관이라는 것이 있었다. 북한에는 없는 이름이었는데 열람도 할 수 있고 대출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북한의 도립도서관이나 시립도서관과 비슷한 곳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열람료와 대출요금을 받지 않고 무료였다. ‘세상에! 자본주의 사회인데 공짜로 책을 볼 수 있다니…’
북한에선 공짜로 책을 열람하거나 대출해 주지 않았다. 부담스러울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금을 항상 냈다. 그것도 신간도서가 나오면 수요가 많아 도서관 사서에게 요금 외에 따로 뇌물을 챙겨주어야 볼 수 있었다. 하여간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인데도 북한에 비하면 공짜가 너무 많다. 지하철도 장애인과 노인은 공짜고, 기초생활수급자도 이런저런 공짜혜택이 있고, 노숙자도 공짜로 먹여주고, 최근엔 학교에서도 공짜로 밥 먹여주는데, 사회주의를 한다는 북한도 이러진 않는다. 어찌 됐든 공짜로 책을 배포해주는 기회도 많았다. 우리 집에 돈 주고 구입한 책보다 거저 생긴 책이 더 많다.
서점에 가봤다. 광화문 근처 대형서점에 처음 갔을 때엔 기절할 정도였다. 온 세상의 책이 다 모인 것 같았다. 책 광고도 많았는데 책마다 최고라고,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식이었다. 하긴 부족한 책이라고 광고할 출판사가 어디 있겠는가만 그래도 지나치다 싶었다. 도대체 어느 책이 더 좋지? 책을 몇 개 고르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 많은 책을 다 살수도 없고, 펼쳐보는 책마다 이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이것 같아 정신이 혼미해졌다. 북한에선 눈 두 개도 만족시킬 수 없었는데 남한에선 눈 두 개가 모자라 네 개쯤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책을 꽤 읽었다. 그 과정에 남한에 책이 많지만 꼭 읽어야 할 책과 읽지 말아야 할 책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알았다.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가 있다 보니 더러는 오버하는 책들이 있었다.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바로잡아 주지 못하면 나쁜 책에 현혹되기 쉬운 환경이다. 그래서 책을 안내할 선생님이 필요하고 지도교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선생님과 지도교수도 어떤 경향과 취향을 가졌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느 학교 누구의 제자인지, 어떤 이들과 동문인지 등으로 학벌을 따지는 풍토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 책이나 읽고 잘못된 시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난무하는 현실을 보면 좋은 선생님, 좋은 선배, 좋은 동문은 필요한 것 같다.
北, 최근 종이값 비싸 책 암거래 성행
북한에 비교해 볼 때 책값은 비싸다. 특히 교과서, 참고서 등 전문지식이 담긴 책들이 비싸다. 처음엔 탈북 대학생들이 교과서, 참고서 값이 어떻고 하면서 다소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게 값이 얼마나 된다고? 그런데 알고 보니 확실히 좀 비쌌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었다. 남한은 저작권, 판권 등이 국가에 있지 않고, 또 저자와 출판사, 서점이 수익을 내야 하는 만큼 책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 독재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가 특정 도서를 지원하는 경우에도 일정한 기준과 한계가 있을 것이다.
북한은 교과서 값이 너무 싸서 그런 부담은 없다. 북한 교육이 노동당과 수령의 전사를 육성하는 과정이므로, 군대에 비교하면 군인에게 돈 받고 무기를 공급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 얘기다. 지금은 종이사정으로 책을 많이 찍어내지 못해 출판사들이 책을 뒤로 빼돌려 책 장사꾼에게 넘겨준다. 그러면 수십 배 비싼 가격으로 팔리기 때문에 낡은 교과서를 돌려보며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 어쨌거나 책이 넘쳐나는 남한이 읽을거리가 부족해 몰래 금지된 책을 보다 들켜 혼나는 북한보다는 확실히 천국이다.
북한에선 눈 두 개도 만족시킬 수 없었는데 남한에선 눈 두 개가 모자라 네 개쯤 됐으면 좋겠다. 책이 넘쳐나는 남한이 읽을거리가 부족해 몰래 금지된 책을 보다 들켜 혼나는 북한보다는 확실히 천국이다.
도명학 / 망명북한작가펜(PEN)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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