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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리의 스케치북 | ‘조선적인 사회주의 미술’이란? 2014년 9월호

박계리의 스케치북 33 | ‘조선적인 사회주의 미술’이란?

문학수, , 캔버스에 유채, 39x65cm. (「LES BEAUX-ARTS DE CORE」 1979년 수록)

문학수, <풍경>, 캔버스에 유채, 39x65cm. (「LES BEAUX-ARTS DE CORE」 1979년 수록)

문학수는 평양의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강점기 일본의 가와바다미술학교와 문화학원에서 유화를 배웠고, ‘자유미술가협회전’과 ‘신미술협회’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미술가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일본의 전위미술가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한국적인 모더니즘회화를 만들어내고자 하였던 그의 고민은 일제강점기 그의 작품들에 드러나 있다.

당시 자유미술가협회의 일원이었던 일본 화가 로타니 히로사다와 일본의 저명한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다키구치 슈조 등은 문학수에 대해 “프랑스어 실력이 뛰어났으며 프랑스 문학작품을 매우 좋아했고, 작품의 색채나 분위기는 밀레의 작품과 유사한 향토적인 느낌이었다.”고 증언했다. 특히 하세가와 샤브로는 협회상을 받은 문학수의 작품 5점이 수상자를 뽑는 회의에서 전원일치로 추대되었다며 그의 작품에 애정을 표했다.

원작은 사라졌고 잡지에 실린 흑백사진만 남아있는 그의 작품은 소재적인 면에서 한복을 입은 여인이 등장하고 ‘춘향’이라는 주제의 표현 등을 통해 다분히 한국적이면서도 동시에 비행기를 넣은 표현 등에서 현실의 모습들을 초현실주의적인 화면 구성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문학수, 격동적 화면 속 민중성 표현 녹여내

문학수, , 1939년

문학수, <비행기가 있는 풍경>, 1939년

물론 이러한 그림들은 당시 미술계의 호평과 달리 이후 북한에서는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는 추상주의 미술을 맹목적으로 따랐다고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문학수는 분단 이후 북한에 남아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을 착실히 익혀나갔다. 이 과정에서 문학수는 주요한 몇몇 화가들을 만난다.

첫 번째 주요 인물은 변월룡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레핀 미술대학 교수였던 변월룡(1916~1990)은 소련 문화성의 지원으로 1953년과 1954년 북한에 파견된다.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조선적인 사회주의 미술’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버거운 고민 앞에 서야 했던 북한 화가들과 그 속의 문학수.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의 원류라고 여겼던 러시아에서 교수로 지내는 변월룡과 문학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작 기틀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였다. 이후 변월룡은 건강을 이유로 소련으로 귀국했고, 문학수는 변월룡이 귀국한 이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작품에 대한 토론을 계속 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였다.

변월룡을 통해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에 안착한 문학수는 1951년부터 20년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특히 1958년에는 ‘사회주의국가 조형예술전람회’ 준비를 위하여 세 차례 소련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 때 그는 트레차코프미술관에 있는 수리코프(Vasily Ivanovich Surikov, 1848~1916)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문학수, , 1940년

문학수, <춘향단죄지도(春香斷罪之圖)>, 1940년

수리코프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과거의 정신을 부활시키고 현재와 과거 사이의 신비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특히 화면을 구성할 때 인물 하나하나의 감정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물건들도 자세히 관찰하려고 하는 집요한 고찰에 문학수는 많은 감동을 받는다. 문학수는 수리코프의 작품을 통해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의 전형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이후 문학수는 보다 적극적으로 격동적인 화면의 꿈틀거리는 움직임 속에서 민중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로 흘러가면서 북한 미술계는 유화도 조선화처럼 맑고 선명한 유화로 그릴 것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조선화뿐만 아니라 유화도 대중의 정서와 감정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교시를 내렸다. 이것은 조선화 부분의 논쟁이 정리되면서, 유화에서도 형식·교조·사대주의적 요소를 배격하고 주체를 확고히 세우라는 교시였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유화라는 매체를 사용할 때도 러시아식을 교조·사대적으로 따라하지 않고 조선화만의 특징을 드러낼 때 바로 ‘우리적인 유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지시는 논쟁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첫째, 색을 두텁게 많이 칠하지 말 것. 둘째, 유화에서 색은 밝아야 할 것. 셋째, 작품 안에서 심한 대비를 주지 말 것. 넷째, 색덩어리와 거친 붓자국, 고르지 못한 색층 등은 인민의 미감에 맞지 않음. 다섯째, 손으로 쓸어보아도 걸리는 데가 없게 부드럽게 색층이 정리될 필요가 있음. 여섯째, 색의 색동감과 형태의 정확성, 윤곽의 명료성을 살려야 한다는 내용들이 포함되었다. 이는 격동적인 화면의 꿈틀거림을 좋아했던 문학수의 방향과는 대치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 속에서 1972년 2월 문학수는 조선미술가동맹 서양화 분과위원장으로서 일말의 책임을 지고 신의주로 내려간다. 일반작가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굴곡진 삶의 역사를 지닌 문학수의 작품을 프랑스어판 도록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때 너무 반가웠다. 꿈틀거리는 그의 화면이 내게 무슨 말을 거는 듯 했다.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에 던져진 전위미술가들의 꿈과 좌절, 분단된 조국을 가진 화가들의 열정과 고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솟음치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애환이 그의 화폭에 묻어 있는 듯하다.

김일성은 유화를 대중의 정서와 감정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교시를 내렸다. 이는 격동적인 화면의 꿈틀거림을 좋아했던 문학수의 방향과는 대치되었다. 1972년 2월 문학수는 조선미술가동맹 서양화 분과위원장으로서 일말의 책임을 지고 신의주로 내려간다.

박계리 / 한국전통문화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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