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4년 10월 1일

통통 인터뷰 | “동무들, 집중 좀 하지비예” 2014년 10월호

통통 인터뷰 | 강춘혁 | 탈북래퍼
“동무들, 집중 좀 하지비예”

ITV_201410_59 “동무들, 집중 좀 하지비예” 긴장감이 감도는 의 ‘쇼미더머니3’ 현장. 정적이 흐르고 일순간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저마다의 실력을 뽐내며 힙합의 옥석을 가리기 바쁜 오디션 현장이었지만 낯선 그의 말투는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난 함경북도 온성에서 왔지. 거기가 어딘지 아니? 거기선 지금도 아이들이 굶어죽어. 애들 먹여 살릴 돈이 필요해. 거기는 리설주가 조국의 어머니. But, She is not my 어머니. 내 어머니가 아오지에서 얻은 건 결핵. 땅굴판 돈 착취해서 만든 것은 핵. 대한민국 언론의 자유. 이정도 농담에 날 숙청이라도 시킬 거니? 난 두렵지 않아 공개처형. 그 더러운 돈 나한테 다 가져와. Show me the money!”

충격적인 가사였다. 단 몇 마디였지만 북한의 현실이 함축되어 있었다. 강춘혁 씨는 당당하게 1차 합격 목걸이를 받았다. 시청자들도 직설적인 가사에 관심을 보였고, 랩하는 탈북자의 모습에 호기심을 가졌다. 평소 가슴 속에서 무수히도 많이 써내려간 이야기여서일까. 그가 내뱉은 라임은 아마추어의 실력이 아니었다.

“제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어요”

ITV_201410_60 그가 고향을 떠나온 것은 12살이 되던 해였다. 고난의 행군으로 식량난이 정점으로 치닫던 그때,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이웃주민들은 하나 둘 죽어갔다. 장군님의 품은 더 이상 지상낙원이 아니었다. 강 씨의 가족은 살기 위해 강을 건넜다.

새롭게 자리 잡은 중국에서 가수 유승준의 랩을 보았다. 정권의 선전 일색이던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힘 있고 남자다운 무대였다. ‘아, 저렇게도 노래를 하는구나.’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가사는 그를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강렬한 첫 만남이었다.

3년 후, 강 씨의 가족은 한국의 삶을 선택했다. 더 이상 예전같이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대다수의 탈북 청소년들이 일반 교육과정에 편입되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강 씨 또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중학교를 중퇴했다. 세상과 마주선 청소년에게 허락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친구 집을 전전하며 막노동, 중국집 배달원 등으로 당장 닥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어느새 남한의 꽃제비가 되어 갔다.

스물여섯.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살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다. “후회하지 않도록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기로 했어요. 바로 그림이었죠.”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검정고시를 보고 당당히 홍익대 미술대학에 합격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청년은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했다. 재료를 선택하고 색을 섞는 것부터 배웠다. 어려움은 따로 있었다. 서양 작가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가히 쉽지만은 않았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작품과 친숙한 다른 친구들과는 달랐다. 그렇기에 실력은 자신 있었지만 이론 점수는 늘 바닥이었다. 하지만 즐거웠다. 체계적으로 그림에 대해 기본기부터 다져나갔다.

대학 친구들은 캔버스에 자기 이야기를 표현했다. “저도 제 이야기를 하기로 했어요. 따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었죠.” 그림을 통해 북한의 이야기를 전하기로 했다. 그의 그림을 보며 북한에 대해 알아가고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가도록 하는 것이 일종의 사명감으로 느껴졌다. 늘 탈북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데 주제마저 한계짓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북한’이라는 소재에 얽매어 더 많은 것을 말할 기회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되묻는다. “제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어요?”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예술가에게 이보다 더 선명한 색이 어디 있을까. 긍정적으로 바라보니 남들이 색깔을 고민하는 사이, 종합 예술인으로 넓혀갈 영역을 고민하게 됐다.

“힙합을 통한다면 한번이라도 더 듣지 않을까요?”

ITV_201410_60 그는 이미 다수의 전시회를 통해 북한사회를 고발해 왔다. 그림에는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고향을 떠나왔던 12살 그날의 시선으로 북한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전 북한의 현실을 직접 보고 들으며 경험했죠.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보여주고 싶어요.” 또한 그의 그림은 인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 받는 주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 <북한 아이들의 비밀 일기> 등 북한아이들의 처참한 실상을 담은 동화책의 그림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고, (주)카카오에서 제공한 북한 여성인권을 다룬 서비스에 재능기부를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를 필요로 하는 곳곳에 북한인권 관련 삽화를 제작하고 있다. 그의 붓질은 북한사회에 대한 세상을 향한 증언이다.

그림에 집중하던 그는 음악에 도전한 늦깍이 랩퍼다. 북한의 실상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방법에 구애받고 싶지 않다. 그렇게 오디션에 도전했다. 아직 실력이 부족했지만 떨어져도 상관없었다. 즐기고 싶었고 경험하고 싶었다. 3천여 명의 지원자 중 그는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탈북자가 랩을 한다는 오묘한 조합도 보는 이로 하여금 신선하게 다가왔지만 북한을 소재로 유일한 주제를 선보였다. 특히 저항이라는 힙합의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기에 그가 하는 랩은 어떤 것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비록 힙합에 갓 입문하여 도전하였고, 2차 예선에서 떨어졌지만 세상에 당당히 자신을 드러냈다. 평소 화폭에 담는 북한의 실상을 랩으로 쏟아낸 것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넓어졌다.

최근에는 프로그램의 인연으로 가수 양동근, 작곡가 우디박과 음반제작을 진행 중이다. 북한인권을 고발한 곡, 남한 청년과 함께 꿈과 고민을 나눈 곡, 탈북자로서의 정체성을 담은 곡 등 다양한 노래를 준비하고 있다. 그의 등장을 통해 통일의 당자사가 될 젊은 친구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힙합을 통해 이야기 한다면 한번이라도 더 듣게 되지 않을까요?” 힙합이라는 친숙한 매개체를 통해 또래들이 북한에 대해 낯설지 않고 관심을 갖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리라 믿는다.

“북한 실상 알리는 최초의 탈북래퍼 되고 싶다”

본래 힙합은 흑인들이 인종차별의 비애, 자유로움을 표출하는 창구였다. 지금은 지극히 비주류였던 힙합이 주류화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장르가 되었다. 뉴욕 빈민가의 외침에 귀 기울이면서 세상도 변해갔다. 어쩌면 탈북자와 힙합은 누구보다 어울리는 조합일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이별을 말하는 랩이 판치는 요즘, 그는 힙합으로 북한의 인권을 말하고 자유를 갈망한다.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최초의 탈북래퍼가 되고 싶다.”는 강춘혁. 그는 이름처럼 북한의 봄을 부르는 혁명가를 꿈꾼다. 그의 랩과 그림은 오늘도 말한다. “동무들 집중 좀 하지비예.”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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