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전쟁·평화 | 국가안보, 인간안보 그리고 평화의 의제 2013년 1월호
인간·전쟁·평화 마지막회 | 국가안보, 인간안보 그리고 평화의 의제
시리즈의 첫 편을 ‘2011년 세계사의 주역은 일반인과 대중’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전쟁과 평화에 관련된 국제정치의 논의는 국가지도자, 정부, 국제기구, 다국적기업 등의 역할을 둘러싼 것들이 주를 이루지만, 개인과 대중들도 국제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12편의 마지막에서 다시 국제정치의 담론이 국가안보와 국제안보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인간안보라는 비전통적 안보와 평화의 의제로 확장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안보를 옹호하는 이들은 인간안보의 개념적 근원을 1994년 UNDP 인간개발 보고서에서 찾으려 하지만 인간안보의 철학적 배경은 인류 전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로마제국의 흥망에서도 전쟁과 평화는 인도주의에 대한 논의를 수반하였으며, 1858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솔페리노 전투에서의 구호활동 경험을 한 앙리 뒤낭의 주도 아래 창설된 국제적십자위원회도 인도주의에 기반한 평화주의 사상을 확산시켰다.
그렇지만 현대적 의미의 인간안보와 연결되는 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 말 유럽 지역을 무리지어 떠돌던 난민들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국제협력에서 찾을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묘사하였듯 이 당시 난민들은 국적을 상실했을 뿐인데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상실하였으며, 국경과 국경의 사이에 머무르기 때문에 어느 국가로부터도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였다.
일부 국가의 정부들은 난민들의 대량이동이 국가안보와 국제안보의 위협이 되기 때문에 국제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난민의 정치적 상징성보다는 누구나 난민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이들의 보편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지역사회, 국가, 국제사회의 안보를 확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제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안보의 개념을 국가안보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국제안보, 사회안보, 인간안보라는 다층적 구조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보개념 다층적 구조 파악해야
인간안보의 입장에서 볼 때 안보는 인간과 사회의 공통적 가치와 선을 실현시키기 위한 공공재이다. 전통적 국가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가 모든 개인들의 안보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안보는 개인 혹은 개인들의 그룹으로서 인간을 안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안보가 영토와 주권이라는 전통적 제도들을 모두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 개인들에게는 국가안보도 중요하지만 질병, 가난, 환경오염, 범죄 혹은 가정폭력 등이 더 큰 안보의 위협이기 때문에, 인간안보는 국가와 국제사회가 이러한 비전통적 안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함을 강조한다. 전통적 국가안보의 개념은 인간의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인간안보는 안보담론의 관심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안보는 ‘책임으로서의 주권’이라는 개념이 형성 및 발전되면서 국제사회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국민들의 개인적 안보를 실현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기 때문에 국가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 해당국가의 책임은 국제사회에 양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권존중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강조하는 현실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주장을 수용할 수 없으며, 국가안보나 국제안보와 같은 전통적 안보의 영역보다 인간안보와 같은 비전통적 안보를 우선시 할 수 없다.
인간안보, 국제사회 개입 근거로 활용되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국제정치의 현실에서는 자연재해와 질병, 테러리즘 등에 대하여 대처할 능력이 부족한 정부의 지도자들이 국제사회의 즉각적인 인도적 개입과 지원을 요청하기도 한다. 혹은 국내의 인도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국제사회의 지원활동을 사실상 자의적으로 거부할 명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정부들은 자국 영토 내의 인도적 위기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과 지원을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2011년 한 해 동안 국내피난민들의 약 56%가 유엔난민기구(UNHCR)가 관련된 인도적 지원활동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인간안보는 국가안보가 필연적으로 국민들의 안보를 증진시키지 않는 경우 이의 개선을 위하여 국제사회가 개입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개념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국가안보에 기반한 전통적 안보의 개념은 내전과 인종청소 등으로 인하여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안보를 지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안보의 관점에서 국제사회는 해당 국가에 개입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은 코소보, 르완다, 소말리아 등에서 발생했던 인종청소의 경험 등을 상기시키면서 주권 존중의 원칙에 따른 국내 혹은 국제정치가 국가폭력과 내전 등으로부터 개인들을 보호할 수 없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인간안보의 이러한 주장들은 국제사회의 이해에 따라 개입이 결정되기도 하며, 국제사회의 여론에 의해 개입결정 과정이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인간안보가 전통적 안보담론과 차별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지나친 개념적 확장에 따라 정책적 대상이 누구인지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국제사회는 국가안보와 인간안보의 문제가 상충하는 경우 여전히 국가안보를 더 중요한 의제로 다룬다. 2012년 여름부터 현재까지 한반도 주변 국가들은 권력재편기를 맞고 있으며, 영토갈등과 과거사 문제, 북한의 광명성 3호 2호기의 발사성공 등으로 인하여 동북아시아에서의 안보담론이 전통적 의제를 중심으로 주도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관련 국가들이 협력적으로 해결해야 할 비전통적 안보의 의제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탈북자들의 인권보호, 북한 내 식량문제와 북한아동의 영양결핍의 문제, 비무장지대의 대인지뢰 사용, 역내 난민 및 국내피난민들의 재정착 문제, 각국의 환경파괴에 의한 이재민 발생, 인신매매, 국제 경제위기 등과 같은 비전통적 안보와 평화의 의제들에 대해서도 국제 및 지역적 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국제정치의 책임성이 더 이상 국가수준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수준으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송영훈 /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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