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4월 2일

특집 | 동독 출신 ‘콜의 소녀’에서 통일독일 3선 총리로! 2015년 4월호

특집 | 메르켈 프로젝트, 통일한국 미래 연다!

동독 출신 ‘콜의 소녀’에서 통일독일 3선 총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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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라 메르켈(앙겔라 도로테아 카스너) 독일 연방 총리는 1954년 7월 17일에 당시 서독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는 베를린 출신으로 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으며, 어머니 헤르린트 카스너는 함부르크 출신으로 대학에서 영어와 라틴어를 전공한 후 교편을 잡았다. 앙겔라의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개신교 목사가 되었으며, 앙겔라가 태어난 지 불과 몇 주 후에 앙겔라의 가족들은 구 동독에 속한 브란덴부르크의 크비트초브로 이주하였고, 3년 후에는 다시 템플린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정착하였다. 앙겔라는 남자 형제인 마르쿠스 그리고 자매인 이레네와 함께 기독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가족의 일원으로 평탄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메르켈 총리는 8학년까지는 템플린의 괴테 학교를 다녔으며 그 이후부터 대학교에 진학한 1973년까지는 템플린 종합고등학교에 다녔다. 1973년에 대학입학 시험인 아비투어에 합격하였으며, 특히 수학과 러시아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라이프치히 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하였는데, 이는 과학 과목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 이외에도 자연과학은 동독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분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학 생활은 메르켈 총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대학 재학 중인 1977년에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인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남편과 함께 동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과학원 물리화학 중앙연구소에서 근무하였고 이곳에서 1986년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첫 번째 결혼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으며, 1981년에 파경을 맞았다. 현재의 남편 요아힘 자우어 교수와는 1998년에 결혼하였다. 남편은 물리화학자로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독에서 물리학 전공 … 통일독일 첫 내각에 입각

1989년 가을에 있었던 구 동독지역에서의 평화혁명 이후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출발 민주주의’라는 정치세력에 합류하였다. ‘출발 민주주의’는 1990년에 서독의 기민당(CDU : 기독교민주당)과 통합되었다. 1990년 3월 18일에 당시 동독에서 치러진 최초이자 최후의 민주선거 이후 메르켈 총리는 마지막 동독 내각인 로타 드 매지에르 총리가 이끄는 과도정부에서 부대변인을 맡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통독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이는 매우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통일 직후인 1990년 12월에 치러졌던 통일 이후 첫 번째 총선에서 메르켈 총리는 연방의회 직선후보로 입후보하여 연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지역구는 구 동독지역의 가장 북쪽인 뤼겐, 슈트랄준트, 그림멘이었다. 이로써 이곳은 메르켈 총리의 정치적 고향이 되었다.

1990년 12월 총선에서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듬해인 1991년 1월 18일 36세라는 젊은 나이로, 통일 총리가 된 헬무트 콜 총리의 통독 이후 첫 내각에서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의 직무를 시작한다. 통일 직후 첫 번째 내각을 구성하고 동서독 지역 간 화합의 정치가 절실했던 당시의 통일 총리 헬무트 콜에게 앙겔라 메르켈은 동서독 간의 화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카드였다. 이는 앙겔라 메르켈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대표적인 두 개의 그룹인 동독 사람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갖춘 새내기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당시 통일을 이루며 통일 총리라는 호칭을 얻은 독일 정치의 거목 헬무트 콜 총리가 정치적인 필요성에 의해 발탁한 ‘콜의 소녀’가 불과 9년 후에 기민당의 당수가 되고 그로부터 다시 불과 5년 후에는 연방총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때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94년 앙겔라 메르켈은 독일 연방 환경, 소비자보호, 원자로 안전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듬해인 1995년에 베를린에서 열린 유엔 기후회의를 성공적으로 주재하였다.

두 번의 장관직을 거치면서 업무수행 능력을 인정받은 앙겔라 메르켈은 1998년 11월에 기민당의 요직인 사무총장직을 맡게 되었으며, 2000년에는 기민당 총재로 선출된다. 이어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독일 연방의회 내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 원내대표로 활동함으로써 당시 야당 대표로서 정치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세우게 된다. 메르켈 총리는 자신이 속한 정당인 기민당을 통해 독일의 강점을 살려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즉, 기민당이 지닌 가치와 신념을 통해 독일을 위한 최선의 길을 찾아나가는 동시에 다양성의 확보와 이해관계의 조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와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여성은 남성과, 경영자와 근로자는 각각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를 조정하는 것은 늘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따라서 독일 사회를 위해 사람들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수긍할 수 있는 공정한 상태로 만드는 작업은 메르켈 총리가 정치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화합의 리더십에 뚝심과 원칙 갖춰… ‘21세기 철의 여인’

 1. 유년 시절 2. 1973년 템플린 종합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여학생) 3. 1990년 로타 드 매지에르 동독 총리(왼쪽) 내각에서 부대변인으 로 활동하던 시절 4. 1991년 1월 18일 독일연방 여성청소년부 장관 취임 선서를 하는 36세의 앙겔라 메르켈
1. 유년 시절 2. 1973년 템플린 종합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여학생) 3. 1990년 로타 드 매지에르 동독 총리(왼쪽) 내각에서 부대변인으 로 활동하던 시절 4. 1991년 1월 18일 독일연방 여성청소년부 장관취임 선서를 하는 36세의 앙겔라 메르켈

2005년 5월에 당시 여당이던 사민당은 몇 차례에 걸친 주 선거 패배 이후 총선을 1년 앞당겨서 치를 것을 제안하였으며 이에 따라 기민당과 기사당은 원내대표였던 앙겔라 메르켈을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연방총리 후보로 결정했다. 2005년 9월 18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사민당에게 신승(辛勝)을 거두었으며 그 결과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상 두 번째의 대연정(기민·기사당과 사민당)이 구성되었다. 앙겔라 메르켈은 같은 해 11월 22일에 독일연방의회에서 397표의 찬성표를 얻어 독일연방공화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4년 후인 2009년에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총선에서 다시 승리한 후 10월 28일에 독일연방의회에서 앙겔라 메르켈은 또 다시 연방총리로 선출되었다.

두 번의 임기에 걸쳐 연방총리직을 수행하면서 앙겔라 메르켈은 안정적인 경제기조를 유지하였으며 유로화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 독일 내 핵발전소 폐쇄시기를 앞당기는 한편 신재생에너지 활용을 늘리는 에너지 정책을 실시하였다. 2013년 9월 22일에 실시된 독일연방의회 총선에서 사민당에 압승을 거둔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총리후보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석 달 후인 12월 17일에 연방의회에서 총 621표 중 462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세 번째 독일연방총리직에 취임하였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동독 출신의 여성 물리학자에서 통일독일의 3선 연방총리라는 정치거목으로 성장하였다. 물론 메르켈 총리가 이렇게 성장하게 된 계기는 헬무트 콜이라는 정치적 후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 총리의 발탁으로 인한 두 차례의 장관직 수행 이후에 기민당 내에서 사무총장과 당수 그리고 2005년에 기민당·기사당의 연방총리 후보로 지명되기까지는 수많은 도전과 시련이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지난한 정치적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정치역량을 키우고 발휘하며 자신의 능력을 검증 받았다.

이제 메르켈 총리는 비단 독일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 나아가서 세계 정치무대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는 주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답이 없어 보이는 곤란한 상황에서 이해당사자들의 합의를 이끌어 낼만한 길을 제시하는 화합의 ‘엄마 리더십’과 지난한 협상과 조정과정을 감내하는 뚝심, 그러면서도 적절한 원칙을 고수하는 ‘21세기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단호함이 자리잡고 있다.

통일한국 보듬을 한국의 메르켈을 기대해본다

메르켈 총리는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동독 공산주의의 독재정치를 스스로 경험하였기 때문에 자유의 소중함을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알고 있으며, 가족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한 노동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이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근간임을 알고 있다. 조국인 독일의 경제사회적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만, 동시에 유럽의 안녕을 위해서도 두 팔을 걷어 부치고 앞장서고 있다.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아실현을 위한 기회를 가질 권리가 있으므로 교육 및 직업교육의 기회를 보장받을 필요가 있다는 점 또한 메르켈 총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이다. 그에게 정치는 이렇듯 자유와 연대 그리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활동이며 이는 또한 메르켈 총리가 목표로 삼는 정치적 가치이기도 하다.

향후 통일이 된다면 통일한국의 앞날을 두 어깨에 짊어질 어질고 현명한 지도자가 될 청년이 지금 북한 어딘가에서 또는 이미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의 품으로 온 북한이탈주민 청년들 중에 자라고 있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이것이 바로 통일한국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듬을 한국의 메르켈을 기대하는 이유다.

김영수 /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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