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고향을 가다 | “북한보다 더한 땅 끝이 어디 있겠습니까?” 2015년 4월호
명사의 고향을 가다 | 김성이 前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북한보다 더한 땅 끝이 어디 있겠습니까?”
조선왕조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서북지역의 최북단은 평안북도 의주였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백성들을 버리고 황황히 그 의주 땅까지 몽진했다. 국경무역을 전담하고 있던 압록강변의 의주읍은 선조임금이 다녀갔다고 해서 부(府)로 승격됐고, 의주는 부사가 다스리는 대처가 되었다. 의주를 넘어 만주사람들이 다니는 꾸불꾸불한 팔백리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광활한 만주 벌판의 중심도시이며 청나라의 근원지였던 심양이 나온다. 조선이라는 변방의 사절들은 그 팔백리 길을 허우적거리며 심양까지 달려가 언제나 그곳에서 행장을 추스른 다음에 북경으로 향했다.
대륙의 문물도 북경에서 곧장 오지 않고 언제나 심양이나 조선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영구라는 항구도시를 거쳐 수입되었다. 바로 이런 연고로 대원군이 조선반도를 틀어막고 쇄국정책을 펼 때 영국계의 선교사인 맥킨타이어와 로스는 심양과 영구항구에 자리를 잡고 의주출신 상인들을 상대로 신약성서 번역운동을 펼쳤다. 그때 평안도 말로 쪽복음을 번역하는 데 헌신했던 의주 청년들은 대부분 인삼이나 호피를 들고 만주상인들과 무역을 하던 상인들이었다. 그 중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로 알려진 백홍준이나 이응찬 같은 이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다 의주출신의 선비이자 상인들이었다.
신생도시 신의주, 교육·신앙·무역의 중심도시로
그런데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세상이 바뀌고 나자 일본은 한국정부의 승인도 받지 않고 멋대로 압록강 하구에 철도를 놓기 시작했다. 조선의 시조, 이성계가 회군했던 위화도 옆에 있는 한촌을 거쳐 만주 단둥을 통과하여 곧장 봉천으로 이어지는 만주철도였다. 그 철도로 인해 압록강 하구에 신생도시가 생겼다. 1911년 11월 압록강 철교가 완성되자 조선반도를 합병한 조선총독부는 유서 깊은 의주부에 있던 평안북도 도청을 새로 생긴 신생도시로 옮기고 그 도시 이름을 새로운 의주, 즉 신의주로 바꿨던 것이다.
신의주는 젊은이들이 거리를 메우는 젊음의 도시였으며, 국경무역을 전담하는 국제도시였으며, 수풍발전소와 함께 대륙으로 향하는 수많은 나그네들이 모이는 신의주역이 위용을 자랑하는 도시였다. 그런 젊음과 활발함을 기초로 하여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거리와 모퉁이 하나만 건너면 교회건물이 보일 정도로 개신교의 교세가 당당하였다. 그 중에서도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을 졸업한 한경직 전도사가 젊은이들과 마음껏 어울리는 신의주 제2교회가 유명했다.
이런 젊음의 도시, 신앙의 도시, 국제무역의 도시에 소련군이 들어왔다. 따발총을 든 소련병사들은 시계 찬 사람만 보면 “다와이(내놔)!”라고 하면서 시계를 빼앗아가고, 백주에도 여자만 보면 끌고 갔다. 공산당들이 교회의 간판을 내리고 학교수업을 방해했다. 1945년 9월 이후의 일이었다. 그해 11월 16일, 신의주 용암포에서 열린 기독교사회민주당의 지방자치대회에서 용암포 대표가 외쳤다.
“기독교 신자가 많다고 하여 폐교시킨 수산기술학교의 폐교를 철회하라! 소련군은 약탈을 그만두라! 백주대낮에 이 땅의 여성을 욕보이는 만행을 중지하라!” 흥분한 학생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학원에 자유를 달라! 인민에게 신앙의 자유를 달라! 학원에 진리추구의 자유를 달라!” 삽시간에 학생 수천 명이 집결했고 그들은 구호를 외치며 도청과 공산당 본부로 달려갔다. 공산당 보안대원 소련군이 무차별사격을 시작하여 순식간에 24명의 학생이 피살되었다. 350여 명이 피를 흘리며 쓰려졌고, 1,000명 이상의 학생과 젊은이들이 보안대에 끌려갔으며, 갖은 악형 끝에 200여 명 이상이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이 사건이 광복 직후 북한지역에서 발생하였던 가장 큰 사건,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겨울이 지나고 1946년 봄이 되자 신의주 일대에서는 대대적인 남하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자고 나면 집이 비고, 가게가 문을 닫고, 공장이 폐쇄되고, 교실에서 학생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거리와 마을은 텅 비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밤에 도망가는 ‘남행 엑소더스’ 행렬을 막지 못했다. 그때 38선의 형편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김성이(金聖二) 박사는 증언하고 있다.
“그때 38선은 소련군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렇게 엄하게 지키지는 않았다고 해요. 따발총을 든 소련병사는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고 무조건 ‘다와이’를 외쳤다고 해요. 그러면 안내인이 일행의 팔뚝에 차고 있던 시계를 모으고 금반지 몇 개를 모아서 건넸고, 소련병사는 슬그머니 먼 산을 바라보며 뒤돌아섰다고 해요. 또 그때는 놀랍게도 업고 가던 아이들을 일부러 울리기도 했다고 해요. 마음 약한 소련병사들은 우는 아이들을 보고 얼른 가라는 신호까지 했답니다.”
올해 칠순을 헤아리는 김성이 박사는 해방되던 이듬해, 그러니까 신의주 의거가 있었던 이듬해인 1946년 겨울에 부모의 등에 업혀 신의주에서 내려온 탈북민이다. 비록 아버지 김병로 집사와 김애은 권사의 등에 업혀 오느라 남하의 경황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갓난둥이였지만 당당히 38선을 넘은 탈북1세대임은 틀림이 없다. 당시 북에서 내려와 서울에 자리를 잡은 사람에게도 지금의 하나원처럼 집결지가 있었다고 한다. 누가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지만 당시 장춘단에 공원이 있었고, 그 공원은 널찍하게 비어있었기 때문에 서울시에서는 그곳을 탈북민들의 1차 정착지로 삼고 있었다. 천막도 세워주고 군정청에서 나오는 밀가루도 가능한 대로 배급해주었다고 한다.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식으로 경계가 이루어지고 일단 거기서 정처가 정해진 사람들은 하나 둘씩 빠져 나가는 형편이었다.
‘영락교회’ 남하인들의 피눈물 나는 헌금으로 성장
그때 장춘동에서 일단 숨을 고른 사람 중에 다수는 공터가 많은 용산쪽 해방촌으로 향했는데 신의주쪽 사람들은 서울도심의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는 중구에 모이기 시작했다. 중구 중에서도 남학동과 주자동 일대가 신의주 사람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에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경직이라는 개신교 성직자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이지만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장로교 계열의 엠포리아대학을 거쳐 1929년 프리스턴대학교 신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는 신의주에서 목회생활을 하다가 윤하영 목사와 함께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조직하여 반공활동을 했고 공산당의 탄압으로 남하했다. 그의 이런 분명한 반공주의 노선과 복음주의 사상을 흠모하였기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온 신의주 사람이나 평안도 사람들은 무조건 한경직 목사부터 찾았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가 영락교회이고 영락교회는 한국 개신교회의 표본이 되었다.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한경직 목사가 시무하는 영락교회로 모였고 영락교회에서는 예배가 끝난 광고시간에 ‘북에서 내려온 아무개가 누구누구를 찾습니다’라는 광고를 공식적으로 했다. 이 광고가 바로 남하한 혈육들을 찾는 이산가족찾기의 효시였다. 영락교회에서 가족을 찾은 사람들은 대개 남대문시장으로 나가 장사를 했고 장사를 해서 입에 풀칠을 하게 된 사람들은 어김없이 십일조를 했다. 그 남하인들의 피눈물 나는 십일조와 헌금에 의해 영락교회는 교회 이상의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6·25를 전후해서도 영락교회는 탈북민들의 중심지가 되었고 만남의 광장이 되었다.
신의주 출신 1946년생 김성이 소년은 어머니 등에 업혀 장충단 공원의 천막생활을 하였고 그 후에 다시 아버지 등에 업혀 영락교회가 보이는 서울 중구의 남학동, 주자동 일대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학교에 나갈 형편도 못 돼 초등학교 1~2학년 과정을 영락교회에서 운영하는 ‘영락 성경구락부’라는 공부방에서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가 겨우 일자리를 잡자 일신국민학교에 편입했다. 그런데 김성이 소년은 그 어수선한 6·25 피난생활 속에서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은 덕분에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성이 소년은 학생을 열 명 밖에 뽑지 않는 사회사업학과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동창생들이 놀렸다.
“야, 법대나 상대에 가서 출세를 해야지. 왜 뜬금없는 사회사업학과냐? 거긴 고생하는 데야. 고생을 사서 하는 데라고.” 그러나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그를 격려해주며 이런 말을 하셨다.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구나. 사서 고생하는 사회사업학과를 선택하다니……, 네 큰할아버지가 평양신학교를 나와 우리나라 최초의 중국선교사가 되시고 산둥반도로 건너가 고생하셨던 그 내력을 알고 있지?”
김성이 소년의 큰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중국선교사 김영훈 목사이다. 1913년 평안북도 노회에서는 평양신학교를 나온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 세 명의 목사를 중국 산둥성의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 파송의 명분은 대단히 감동적인 내용이었다. “우리 평안도 사람들이 일찍이 중국에 있던 맥킨타이어, 로스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중국 땅에 복음을 갚읍시다.” 이런 명분과 사명으로 큰할아버지 김영훈 목사는 100년도 넘은 그 시절에 중국 산둥성 연태를 거쳐 래양현에 ‘래양교회’를 세웠다.
김성이 소년은 대학에서 사회사업학을 마치고 미국 유타주립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사회사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성심여대를 거쳐 이화여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가르치다가 현장봉사를 자원했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한국청소년학회, 한국사회복지학회를 맡아 필드워크를 지휘했고, 2000년대부터는 국무총리실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장을 시작으로 한국사회복지교육협의회 회장, 한국사회복지사협회 회장 등을 맡았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며 초대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있다. 부인과 함께 100년 전에 큰할아버지가 개척했던 중국 산둥성의 래양교회를 방문하며 눈에 띄지 않게 봉사를 하고 있고, 신의주가 빤히 보이는 중국 단둥에 가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빵보급운동도 하고 있고 청소년들의 건강을 위한 의료봉사활동도 열심히 지원하고 있다.
“우리의 통일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지금은 영락교회에서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NK국제학교를 운영하며 영어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김성이 장로는 100년 전에 큰할아버지가 황해바다를 건너 산둥반도로 가서 복음화 운동을 한 것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리고 한경직 목사가 남긴 유지, ‘민족복음화’라는 화두를 놓치지 않고 있다. 김 장로는 우리의 통일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단언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3만여 명이나 탈북을 한 것이 통일시대이지 무엇이 통일시대냐고 반문하고 있다. 북한을 넘어온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일이야 말로 가당찮다고 단언한다. 우리도 그들에게 배워야 하며 그들의 눈높이로 서로를 평등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강권하고 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요. 북한보다 더한 땅 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북에 복음을 전하는 날, 통일은 선한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영락교회 앞, 허름한 3층 건물의 연구실에서 겸손하게 땀 흘리는 김성이 전 장관은 진짜 봉사하는 사람 같다는 인상을 준다. 그의 전공 때문인지 제대로 믿는 그의 믿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뷰 및 정리 : 김광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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