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가 숨 쉰다 | 귀룽나무, 비무장지대 봄을 알리는 메신저 2015년 4월호
DMZ, 평화가 숨 쉰다 18
귀룽나무, 비무장지대 봄을 알리는 메신저
여러 해 동안 비무장지대 일원에 다양한 생명들과 마주할 기회가 많은 필자는 늘 가슴에 두근거림이 있다. 계절과 기후, 시기와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과 느낌으로 다가서는 자연이 참으로 경이롭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 겨울은 도시보다 유난히도 춥다. 겨울조류 조사를 위해 아무리 방한복을 두툼하게 입어도 체감온도 -30℃인 겨울 임진강 칼바람은 피부를 아프게 한다. 그럼에도 수십만 마리의 겨울철새들이 방문하여 보여주는 시끌벅적한 군무 덕에 살을 에는 추위를 보상받는다. 그러다 봄날 남풍이 불면 아주 짧은 순간에 군무를 보이던 요란한 철새들도 제 고향 시베리아로 떠나버려서 그야말로 텅 빈 들녘이 고독하게 느껴진다.
하얀 눈꽃이 폭죽으로 터지다
겨울철새가 떠난 몇 주간은 금단증세처럼 한참을 힘들어하게 된다. 늘 가슴 부풀게 보고 싶던 그들이 안전한지 살펴보던 그 마음 달랠 길 없어 땅바닥에 엎드려 냉이꽃, 꽃다지를 볼 때쯤이면 다시 숲의 향연을 알리는 매력적인 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귀룽나무다.
처음 필자가 귀룽나무를 볼 때 ‘아 이런 나무가 여기에 사는구나.’ 하면서 탄성을 질렀다. 모든 겨울철새가 사라지고 봄꽃이 피기 시작하는 4월 들녘에 귀룽나무는 회색 빛깔을 물로 헹군 듯 빛바랜 모습 사이에 아주 당당한 나뭇잎을 시원스레 펼친다. 거기에 하얀 눈 같은 꽃들로 제 몸을 온통 감싸버리는 귀룽나무는 폭죽 같은 수형을 가진, 봄날을 알리는 메신저다. 흔히 개나리, 진달래를 봄의 상징으로 이야기하지만 적어도 민통선 초평도의 봄날은 귀룽나무가 알려준다.
귀룽나무는 임진강 하구습지에 군락을 이루는 습지성 수목의 대표종이다. 귀룽나무는 장미과 교목으로 생약명으로는 구룡목(九龍木)으로 불린다. ‘넓은 잎 큰키나무’로 줄기가 굵고 조금 비틀리며 곧거나 굽어져서 15m 정도 자란다. 가지가 길고 무성하게 뻗어 아래로 쳐지며 위쪽이 둥그스름해진다. 새 줄기는 큰 나무 뿌리 쪽에서 많이 나온다. 귀룽나무 모습은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나무는 줄기와 원줄기의 구분이 뚜렷한데 귀룽나무는 버드나무처럼 원줄기와 원가지가 잘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유연한 이음새가 특징이다. 자연스럽게 위로 오르다가 잘 자란 가지를 아래로 늘어트린 모습으로 매우 아름답다.
어린 가지를 꺾으면 톡 쏘는 냄새가 나고, 깊은 산 200~1,000m 고지의 골짜기나 비탈, 계곡가에 주로 서식한다. 해마루촌 앞의 골짜기와 초평도 앞 세월천 상류에는 이런 귀룽나무의 군락이 있다. 나무에는 길이 6~12㎝ 정도의 잎이 가지에 어긋나게 달린다. 끝이 뾰족하거나 꼬
리처럼 뾰족한 타원형이며 가장자리에 부드럽고 불규칙한 잔 톱니가 있다. 잎자루는 붉은빛이 돌고 털이 없으며 꿀샘이 있다. 가을에는 단풍 또한 아름다워 임진강변의 화려한 만추를 신나무와 함께 연출한다.
중풍·장염·기침·간질환·자양강장 등에 효과
꽃은 4월에 새로 나는 햇가지의 잎이 달린 자리에 흰색으로 핀다. 나무 전체를 덮을 정도로 소담하고 가득 피어서 연녹색 잎과 하얀 꽃의 조화가 매우 인상적이다. 털이 없고 같은 길이로 어긋나게 갈라진 꽃대가 나와 끝마다 지름 1~1.5㎝ 정도 되는 꽃이 달린다. 꽃받침 잎은 5갈래이며 연녹색을 띤다. 6~7월에는 단단한 핵으로 싸인 씨앗이 있는 지름 8~10㎜ 정도의 둥글고 붉은 열매가 검은색으로 여문다. 조금 떫은맛이 난다. 어린 나무의 껍질은 갈색빛 도는 회색을 띤다. 묵을수록 검은 회갈색이 되며 세로로 얕게 갈라진다. 껍질눈이 많아 울퉁불퉁하다.
용도는 약용으로 중풍마비, 장염, 기침, 가래, 간 질환, 자양강장제로 쓰인다. 어린잎을 데쳐서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내고 나물로 먹거나 튀김, 찜을 해먹는다. 익은 열매를 과실로 먹는데 조금 떫다. 열매는 가을에 채취하여 햇볕에 말려 쓰기도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귀룽나무의 존재를 잘 모른다. 이 나무가 자라는 위치가 습지 숲이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는 세월천, 수내천이 아직 자연형을 띄고 있다. 임진강과 지류를 이루며, 큰 강과 생태통로로 연결되어 다양한 생물군을 이루고 있다. 비무장지대 하천들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조사하는 우리는 모든 생물의 피난처에서 그 생명을 유지하는 섬세한 자연성의 배려덕분에 기쁨을 선사받는다. 이곳은 생육과 번성의 한 장소로 겸손과 지혜를 터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분단비용을 지불하며 겨우 얻은 자연생태가 과도하게 증가하는 인삼밭 때문에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있다. 인삼을 재배하기 위하여 전쟁 이후 자연스레 복원된 습지 숲을 별 고민 없이 하루아침에 파헤치고, 땅속 생물조차 농약으로 삶을 차단당하고 있다. 그런 곳에서 인간의 건강을 위한 식물을 재배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기서 자란 인삼을 좋아하고 열광한다. 분단비용과 생물의 희생은 어찌하고…. 귀룽나무에는 꽃이 피는데 회칠한 들녘, 우리의 마음엔 언제 봄이 오려나.
김승호 / DMZ생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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