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3년 3월 1일 0

윗동네 리얼 스토리 | 한국엔 가도 남조선엔 가지마? 2013년 3월호

윗동네 리얼 스토리 25 | 한국엔 가도 남조선엔 가지마?

얼마 전 이야기다. 두 노인이 간소한 술상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 다 엇비슷한 나이인 것 같은데 대화를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창문을 등대고 앉은 노인은 반말을 쓰고 마주 앉은 사람은 “예, 예.” 한다. “형님은 올해 들어 더 늙으신 것 같습니다.”, “먹는 게 부실하니, 어제와 오늘이 다르네. 그런데 60 청춘, 90 환갑을 노래하는 노동당 시대에 나보다 한참 젊은 자넨 왜 그리 늙었나?”

창문 노인이 긴 한숨을 쉬며 빈정대듯 물었다. 마주 앉은 사람은 옷을 올려 빼빼 마른 가슴을 보였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톡톡 짚으며 노래하듯 말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고난의 세월 표본이지요. 살점이 다 도망가 버리니 늙어 보일 수밖에, 나라를 위한 일등공신의 몸 아닙니까?”, “흐흐 그렇긴 해. 핵을 만들어 먹고사는 나라 인민이 살이 찌면 안 되지. 허리띠를 졸라매고 나라를 위해 배고픔쯤은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만날 말하는데, 안 그런가?”

“선생님이 미국·남조선 치려면 핵미사일이 기본이랬어”

그때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 평양시 학생소년들이 2013년 설을 맞아 준비한 설맞이 공연이 재중계되고 있었다. 밖에 나갔던 손녀로 보이는 여자애가 뽀르르 달려 들어왔다. 공연보다 술상에 더 관심이 있는지 “할아부지” 하며 상에 다가앉는다. ‘2·16명절’(김정일 생일)이라 안 사람이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두부부침을 냉큼 들어 맛나게 먹는다.

“어허, 버릇없이! 넌 텔레비나 봐. 어른들 술상에 마주 앉으면 못써.” 빼빼 마른 이가 옷을 내려 가슴을 가리며 눈을 흘겼다. “한국 간 아빠가 보낸 돈으로 먹으면서, 할아부진 깍쟁이.” 아이는 입을 삐죽하며 TV 볼륨을 높였다. 화면에서는 ‘햇님의 축복’이라는 공연이 진행되고 ‘은하 3호’ 로켓을 형상한 인형이 주역으로 등장해 춤을 추고 있었다.

“참 저게, 글쎄, 음음.” 빼빼 마른 이가 입을 쩝쩝 다신다. “자네 왜 그래? 술이나 마실 것이지 벌써 취했나?” 그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애를 향해 “야, 텔레비 꺼.” 하고 빽 소리친다. “싫어 재밌는데.”, “끄라니까.”, “싫다니까 난 저 미사일이 좋아. 유치원 우리 반 선생님이 그러는데 우리나라를 먹으려는 미국과 남조선을 치려면 핵미사일이 기본이라고 그랬어. 근데 할아부진 왜 싫어 해?” 말문이 딱 막힌다. 빼빼 마른 이는 억이 막히는지 주먹을 쳐들고 눈을 부라렸다. 손녀 애는 혀를 날름하며 TV볼륨을 더 높여 놓고 쌩하니 윗방으로 달아났다.

“어이구,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애들까지 저 모양이니. 형님도 미사일이 좋소?”, “글쎄, 자네도 풍계리 핵실험 소식 들은 모양이구만.”, “귀 막고 살지는 않소이다. 이제 이 텔레비가 또 소리칠 건데 듣지 못할 리가 있소. 듣기 싫어서 원, 그 돈이면 백성 구제 하겠수다.” 빼빼 마른 이가 TV를 끄며 투덜거렸다. “쉿 누가 듣겠네. 그런데 애비가 한국에 간 걸 잘 알고 있는 애가 왜 남조선을 쳐야 한다고 말하지?”, “말도 마소, 며칠 전 보도시간에 핵실험 소식 들으면서 만세까지 부른 녀석이우다. 뭘 알고 그러는지 원.”

“백성이야 죽건 말건 핵하고만 씨름하는 이곳에 미래는 없다”

“그거야 뭐 만날 듣는 선전 속에 사는 애들이니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애비가 보내주는 돈을 먹고 살면서도 애비가 사는 남조선을 경멸한다는 건 좀 지나치지 않나?”, “허허, 애가 뭘 잘 모르니까유.”, “무얼 몰라?”, “형님, 나도 처음 아들이 국경을 넘어갈 때 이런 당부를 했댔시다.”, “무슨?”, “너 한국엔 가도 남조선엔 제발 가지 말라, 그런 당부죠.”, “뭐? 흐하하하.”, “한국이 바로 남조선이라는 걸, 아들이 그 땅에 정착해서야 알게 됐지요. 저 말괄량이 딸년도 제 애비한테 보내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그처럼 경멸하던 남조선이 한국이라는 걸 저 애가 알게 되면, 그땐? 흐하하하.”

술잔을 든 채 노인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자네 정말 저 애를 한국에 보낼 용기가 있나?”, “그게 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인 것 같수다. 백성이야 죽건 말건 핵하고만 씨름하는 이곳에 애들의 미래가 없다는 걸 형님도 아시면서…”

이지명 / 계간 〈북녘마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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