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5월 1일

통통 인터뷰 | “꽃제비, 북한당국 통제 유일하게 벗어난 집단” 2015년 5월호

통통 인터뷰 | 꽃제비 출신 꽃제비 연구자

꽃제비, 북한당국 통제 유일하게 벗어난 집단”

 

오늘도 청진역 대합실에서 눈을 떴습니다. 요즘은 단속도 심하지 않으니 잠을 자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구걸을 하며 터덜터덜 걷다 보니 발길은 어느새 시장에 닿아 있습니다. 솔솔 코끝에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저도 모르게 텅 빈 배를 움켜쥡니다. 저 귀퉁이에 잠시 한 눈을 파는 안까이(아줌마)가 보입니다. 살금살금 다가가 탐스러운 떡을 하나 훔쳐들고 냅다 달렸습니다. 고래고래 소리는 지르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제 친구들 탓에 차마 저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운수가 좋은 날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게 내일이 있기는 할까요? 사람들은 이런 저를 꽃제비라 부릅니다.

ITV_201505_58

시장 확산만큼 꽃제비도 발전한다?

꽃제비는 북한의 부랑인을 일컫는다. 그 어원에 대해서는 ‘꽃피는 봄에 제비처럼 나타나는 어린 거지’ 혹은 유랑, 유목을 뜻하는 러시아어의 ‘코체비예’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주로 유랑 고아를 지칭하며 ‘청제비’, ‘군제비’, ‘노제비’ 등 대상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다. 김혁(33) 씨는 “꽃제비는 북한당국의 사회통제에서 거의 유일하게 벗어나 있는 집단”이라고 말한다. 그 역시 꽃제비 출신이다.

그가 거리를 떠돌기 시작한 것은 아홉 살 무렵이다. 가정의 불화로 무작정 집을 떠난 그가 맛본 것은 뜻밖에도 자유였다. 원하는 곳을 언제든 갈 수 있었다. 홀로 내몰린 거리에서 먹고 자는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지만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상은 통제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하는 수업 외에도 독보회, 생활총화, 꼬마계획 등 모든 것이 속박으로 느껴졌다. 학교에서도 이미 그는 방랑생으로 낙인찍혀 누구도 곁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단속반에 잡히면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졌지만 다시 거리를 찾게 됐다.

거리에는 이미 그와 같은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했다. 10명 내외의 집단생활은 길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해주는 진짜 동지였다. 대부분은 부모 잃은 아이들이었지만 평양에서 강제추방 당한 집의 아이들, 재일교포 가정의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각자의 사연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마음의 병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거리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며 무리도 변해갔다. 무리는 점차 조직화되었다. 단순히 구걸하고, 훔치고, 유랑하는 삶에서 서로 보호하고 기술을 전수하는 사이가 됐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심해지며 이들은 날로 확산됐고 각종 범죄에 연루되기 시작했다. 시장 상인들은 이들을 점차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낯선 광경이 벌어졌다. 꽃제비가 시장 전면에 나선 것이다. 안전원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꽃제비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상인들은 일정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그들을 다른 꽃제비를 막기 위한 치안대로 고용했다. “동정의 대상에서 경계의 대상으로, 최근에는 협력의 대상으로 변모하고 있죠.” 상인과의 유기적 관계가 커진 것이다. 북한의 시장이 커지는 만큼 꽃제비 집단도 더욱 조직화되고 강력해졌다. 일종의 사회문제였다. “그들도 도덕적 죄책감은 갖고 있어요.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존원리가 더 작용하는 것이죠.” 길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죄책감은 점점 흐려져 갔다.

북한당국 고아입양 캠페인에도 속수무책

북한당국도 꽃제비 소탕에 속수무책이었다. 김혁 씨는 꽃제비를 통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꽃제비가 유랑 고아에 불과했던 시기에는 고아원, 소년원 등으로 보내졌지만 그들은 노동력이 필요한 곳에 동원되었고, 배고픔을 참지 못해 결국 다시 거리로 향했다. 1990년대 그들이 전면 등장하자 북한당국은 9·27 상무조를 조직하여 구호소에 꽃제비를 전문적으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구호소에 있다가 굶어죽거나 탈출 과정에서 불구가 되는 이가 늘었다. 1990년대 말 북한은 ‘고아 입양 캠페인’을 펼쳤다. ‘모성영웅’을 강조하여 꽃제비를 일반 가정에 흡수시키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을 키울 여건이 되지 않는 가정이 많았고 아이들은 또 다시 탈출을 반복하며 이 정책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꽃제비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였다. 한 번 거리의 생활을 맛보면 안정보다 자유를 더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열아홉살이 되던 해. 김혁 씨는 꽃제비 생활로 감옥을 오가는 삶에 두려움이 생겼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북한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거리를 집으로 삼은 지 꼭 10년 만에 새로운 터전을 향해 떠났다. 그렇게 도착한 한국땅에서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 사회가 궁금했어요. 여행을 다니며 정착지원금 중 1천만원을 3개월 만에 다 썼죠. 이것도 꽃제비 본능일지도 모르겠네요.” 너털웃음을 짓는 그는 마트 박스정리, 자동차 정비 등을 하며 하루 18시간씩 일하며 죽어라 돈을 모으기도 했다. 최근에는 생애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하며 꽃제비에 대한 관심을 다양한 방법으로 적극 표현하고 있다.

“과거보다 지금의 성실한 삶이 대단한 것”

박사과정에 진학해 꽃제비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는 것이다. 연구는 쉽지 않았다. 선행연구가 많지 않았을 뿐더러 사례자를 모으기도 쉽지 않았다. ‘훔치고, 때리고 했던 일들이 모두 범죄인데 제가 어떻게 비춰지겠어요.’ 지우고 싶은 과거를 들추지 말아달란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꽃제비 출신이다. 그런 과거에도 불구하고 지금 성실히 살고 있는 것이 대단한 것이다.” 그들을 끊임없이 설득했다. 그의 사연은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퍼플맨’의 소재로 채택돼 캐나다 니켈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북한 아동인권을 말하는 전시회에도 참여하고, 꽃제비 관련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어두웠던 과거를 딛고 용기를 얻었다는 고마움이 전해졌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 집단이 있다. 유랑하며 자유를 말하고,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고, 시설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 하지만 꽃제비를 이러한 기준으로 바라보긴 어려울 것 같다. 한국 사회에 꽃제비가 있었다면 우리는 그들을 보호하고 자활하게 도와주어 건강한 사회일원으로 끌어들이려는 사회적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다르다. 북한 사회의 ‘정상화’는 통제의 범주에 그들을 다시 가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꽃제비가 통일한국의 이단아로 성장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김혁 씨는 사회의 불안정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게 하려면 의무감을 심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내부세력을 이용해야 할 텐데 그것이 기존 공권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랑의 과거를 갖고 주먹왕이 되었던 김두한이 대한민국 수립과정에서 대표적으로 반공운동을 하고, 체제를 탄탄하게 만들었던 것은 역설적인 사실이죠. 북한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는 꽃제비도 그와 같이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이때 필요한 게 의무감이죠.”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상상이 통일시대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참 굴곡지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원하던 것을 손에 쥐었다. 자유. 거리를 유랑하며 그가 가장 훔치고 싶었던 것은 자유였다. 내일을 꿈꾸는 그는 이제 이것을 놓칠 수 없다.

선수현 본지기자



댓글 0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 해야 합니다.

좋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