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3년 6월 1일 0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 심구섭 할아버지 “동생 노래 한번 듣고 싶어” 2013년 6월호

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5

심구섭 할아버지 “동생 노래 한번 듣고 싶어”

TS_201306_54 “형님, 형님” 숨이 턱 막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뭔가 대답을 해주고 싶지만 숨이 막히고 목이 매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대답했다. “아우야! 만나자, 내가 가마.”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

1992년이었다. 미국 교포인 지인이 친척 방문으로 함흥에 갔다가 쪽지 하나를 받아왔다. ‘<조선일보> 기자 심○○의 아들 심구섭을 찾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인줄 알았다.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북쪽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떠올랐다. 얼마 후, 다시 편지와 사진이 도착했다. 사진에는 어머니와 할머니, 동생이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오빠 이름을 부르다 돌아가셨다는 메모와 글자에 흐른 눈물 자욱이 묻어 있었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중국인 교수에게 북쪽에 있는 가족을 찾아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1년 반이 지났을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이었다. 전화를 받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동생의 목소리에 그동안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40년도 기다렸는데, 며칠이 왜 이리 긴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국정원과 통일부에서 허가를 받고 짐을 꾸렸다. 겨울이 시작되던 쌀쌀한 날씨였기에 장갑, 내복, 목도리 등 눈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대로 가방에 넣었다. 당시 북한에는 배터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 태엽으로 감는 시계도 10개나 챙겼다. 이래저래 동생이 쓸 수 있는 물건, 그 곳에서 팔아 생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챙겼다. 20kg 가방 두 개가 금세 꽉 찼다. 40년을 기다려왔는데 동생을 만나기 위한 며칠은 왜 이리도 길게 느껴지는 걸까. 혹시 중국에서 기다리는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나 하는 불안함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중국 땅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 보였다. 한 눈에 동생임을 직감했다. 그렇게 둘은 눈을 마주치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형제는 장소를 옮겨 밤새 지난 이야기를 나눴다. 연로하신 아버지는 함께 하지 못하는 것에 아쉬워하며 가족들을 향해 육성 녹음 테이프를 보내셨다. 테이프를 듣다가 이내 눈물이 흐르고, 유년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살아계실 줄 알았던 어머니의 작고 소식에 또 다시 울었다. 어렵게 다시 만난 동생을 뺏길세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동이 텄다.

“거울 보세요. 여동생과 똑같네요”

동생은 과학자가 되어 있었다. 당국으로부터 훈장도 받고 잘 사는 계층이 되어 있었다.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니 혼자만 잘 사는 줄 알고 미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그럼에도 문화적, 생활의 차이가 느껴졌다. 양변기를 쓸 줄 몰라 사용법을 묻기도 하고, 당시 가져갔던 오이 비누를 쓰더니 “이거 미제입니까? 향이 너무 좋습니다.”하며 감탄하기도 했으며, 북에서는 아직 가루 치약을 쓴다며 한국산 치약에 놀라기도 했다. 심지어 아침에 사용한 면도기를 보며 “그거 저 주시면 안됩니까?”라고 했다. 그렇게 하나, 둘 동생에게 주다보니 그 많던 짐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입고 있는 옷과 세면도구, 동생이 가져갈 수 없다던 라디오만 가지고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벌써 20년 전 이야기다. 심구섭 할아버지(80)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돈과 물건들을 북쪽의 동생들에게 보내고 있다. 종종 서신도 주고받는다. 헤어진 지 40년 만에 가진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그 날의 감동은 여전히 가슴을 울린다. 아쉬운 건 여동생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여동생에게서 받은 편지 한 통을 보여주었다. 편지에는 그리움이 빼곡히 묻어 있었다. 동생과 헤어지던 당시 할아버지는 14살, 여동생은 4살이었다. 워낙 어린 나이었기에 오빠를 기억할까 싶었지만, 편지 곳곳에는 둘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함께 기차타고 가며 나눈 이야기들, 차창 밖으로 내민 손이 위험하다고 잡아당기던 오빠의 모습, 오빠 무릎 위에 앉아 놀던 기억 등 서로를 추억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동생이 보내준 사진을 본 주변 사람들이 “심구섭씨, 거울 보세요. 여동생과 똑같네요.”라고 말했을 때는 절로 웃음이 나온다. 여동생의 얼굴에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여동생은 민요를 잘 불러 전국 대회에서 수상을 했다고 한다. “동생 노래 한번 듣고 싶어. 나는 음치야, 내 동생이 나보다 나은가봐.” 동생 노래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심구섭 할아버지는 여동생과 해후하는 날을 수백 번도 더 상상해보지만, 그는 잘 알고 있다. 20년 전 남동생을 만나던 그 날처럼 이름만 부르다 숨이 막히리라는 것을. 그동안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며 가슴이 매어지고 간신히 울음만 터뜨릴 수 있으리라는 것을.

할아버지가 동생을 만나고 지금까지 교류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것은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천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동생과의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현재 심구섭 할아버지는 민간차원의 이산가족 교류주선단체를 맡고 있다. 20년 전 잊을 수 없던 감동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다. 물론 만남을 주선하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있다. 자신의 모습보다 더 늙어 보이는 북쪽의 딸 때문에 오히려 더 속상해진 어머니, 북쪽의 여동생을 만나자 링거주사부터 놓아주던 의사 오빠, 아들을 껴안자마자 정신을 잃은 어머니 등등. 상봉 현장에서는 웃지 못 할 분단의 비극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우리 민족만이 당면한 이산가족 문제, 심구섭 할아버지는 오늘도 다른 이산가족들을 도우며 자신의 아픔을 달랜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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