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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문화유산 톡톡! | 조선이 섬긴 고려의 충신 … ‘포은 정몽주’ 2013년 6월호

북한 문화유산 톡톡! 5 | 선죽교·숭양서원·표충비

조선이 섬긴 고려의 충신 … ‘포은 정몽주’

선죽교 Ⓒ연합뉴스

선죽교 Ⓒ연합뉴스

‘포은 정몽주.’ 아마 남북한을 통틀어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려왕조 470여 년 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역사에 흔적을 남겼으나 정몽주만큼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명확하게 각인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 듯하다. 이는 아마도 스러져 가는 고려왕조에 대해 충절로 일관한 그의 삶과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당한 드라마틱한 죽음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개성 시내 자남산 여관 입구에서 선죽교를 설명하는 여성안내원은 암살 당시 정몽주가 흘린 피가 선죽교 교각에 베어 들어 아직도 붉은 빛이 돌고 있다는 구수하면서도 섬뜩한 이야기로 관광객들의 귀를 사로잡았었다.

개혁파였던 정몽주와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당시까지 뜻을 함께 하였으나, 정몽주가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한 반면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하는 역성혁명을 꿈꾸며 상반된 길을 가게 된다. 이후 정몽주는 이성계를 비롯한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이를 알아차린 이방원에게 선죽교에서 암살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정몽주가 암살되기 직전 이방원과 나눴던 대화는 이방원이 읊은 것으로 전해지는 ‘하여가’와 정몽주의 답가인 ‘단심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운명의 갈림길 선죽교

정몽주와 이방원의 운명을 갈라놓은 선죽교는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약 1㎞ 떨어진 선죽동의 자남산 남쪽에 위치한다. <고려사>에 선지교(善地橋)라는 다리가 기록된 것으로 볼 때 현재의 선죽교는 13세기 초 무렵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후 15세기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선죽교(善竹橋)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13~15세기 사이 선지교에서 선죽교로 이름이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일설에는 정몽주가 피살된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아 ‘선죽교’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선죽교는 길이 8.35m, 폭 3.36m로 화강암으로 축조되었으며,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인 개성유수 정호인이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석조물을 올렸으며 이후 1796년 개성유수 조진관이 다시 난간을 설치하였다. 다리 옆으로는 별도의 석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선죽교를 보존하기 위해 일반인들이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다리를 구성하는 석물 중 일부 범자(梵字)가 확인되는 것은 개성시의 묘각사지 다라니석당 일부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죽교의 옆으로는 ‘선죽교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석의 글자는 개성 출신 명필로 개성 남대문의 현판을 쓴 석봉 한호의 것이다.

개성역사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 권고 판정

정몽주의 생전 행적은 개성 시내와 특별한 관련이 없으나 이후 조선시대에 그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다양한 유적이 자리한다. 그 중 숭양서원은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하며 선조 6년인 1573년 건립되었다. <중경지>에 의하면 1573년 개성유수인 남응운이 정몽주와 서경덕을 추모하기 위해 정몽주가 살던 집터에 숭양서원의 전신인 문충당(文忠堂)을 짓고 정몽주를 주향(主享)으로 두었는데 ‘문춘당’이라는 명칭은 정몽주의 시호인 ‘문충’에서 가져온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몽주의 존재는 용납할 수 없었으나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한 선비로서의 그의 자세와 굽히지 않는 정신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들이 건국한 조선왕조를 이끌어 가는 관료들도 충성심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후 문충당은 선조 8년인 1575년에 선조로부터 ‘숭양(崇陽)’으로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현종 9년인 1668년에는 김상헌, 숙종 7년인 1681년에는 김육과 조익, 정조 8년인 1784년에는 우현보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순조 23년인 1823년에는 유수 김교근과 김이재에 의해 중건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1930년대에도 전반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문충당 마당의 좌우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자리하는데 건물의 우측에 위치한 비석은 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묘정비로 1811년 세워진 것이며, 좌측에 위치한 비석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개성의 유생들이 숭양서원을 유지하도록 승인받아 그 내력을 적은 기실비로 1872년에 세워졌다.

표충비는 숭양서원과 마찬가지로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조성된 유적이다.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한 선죽교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표충비는 비각의 내부에 건립연대가 각기 다른 두 개의 비석이 자리한다. 북쪽에 위치한 비는 영조 16년인 1740년, 남쪽에 위치한 비는 고종 9년인 1872년 건립한 것으로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조선의 왕들이 직접 건립했다는 점에서 성리학의 세계인 조선사회에서 정몽주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유적이다. 비각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현존하는 북한지역의 비각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북쪽비의 비문은 모두 해서체로 되어있는데 비문의 앞면에는 선죽교에 대해 영조가 직접 쓴 시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1740년 9월 3일 영조의 개성 행차 시 선죽교를 돌아보고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미 앞서 게재한 글에서 개성의 문화유적에 대한 북한의 관심과 보존에 대해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북한의 자료에 나타나는 개성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이는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북한의 역사관과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개성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단지 이것만이 아닌, 고도(古都)의 문화자산을 보존하고자 하는 보편적인 바람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금년 5월 13일 북한의 개성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실사 자문기구인 이코모스로부터 세계유산 등재권고 판정을 받았다. 이번 개성역사지구의 등재권고는 이미 한 차례의 등재보류 판정 이후에 이루어져 더욱 소중하다. 그런데 이런 기쁜 소식에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것은 남과 북이 협력하여 등재하고자 했던 처음의 뜻이 다소 잊혀져버려서일까, 등재권고 소식을 듣고도 왠지 씁쓸한 여운이 남는 것은 비단 필자 혼자만은 아닐 듯하다.

박성진 /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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