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 남북대화에서 수석대표 급과 격은 중요하다 2013년 7월호
시론 | 남북대화에서 수석대표 급과 격은 중요하다

남북 수석대표를 맡은 천해성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왼쪽)과 김성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이 지난 6월 9일 판문점 우리측 ‘평화의 집’에서 남북장관급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12~13일 서울에서 개최될 뻔 했던 남북당국회담이 양측의 수석대표 급(級)문제로 무산되었다. 우리는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내세웠고 북측은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하 조평통) 서기국장을 내세웠다. 남북한의 정치체제와 권력구조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두 사람의 급이 서로 카운트파트로서 합당한지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에는 우리의 통일부에 해당하는 정부부처가 없고, 북한은 정부가 아니라 노동당이 권력구조의 상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평통은 노동당의 통일전선부 산하에 있으면서 대남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이다.
북한 당국은 우리 측이 통일부 장관이 아니라 차관을 수석대표로 내세운 것을 비난하며 회담을 위한 대표단 파견을 보류한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하여 남북당국회담이 무산된 다음날 조평통 대변인은 담화를 통해 “지난 시기 북남상급회담(장관급회담) 단장으로 내각 참사 명의를 가진 조평통 서기국 1부국장을 내보내고, 서기국 부국장이 남조선 통일부 차관과 늘 상대해 왔다.”며 “이번에는 남측 당국의 체면을 세워주느라고 1부국장이 아닌 국장을 단장으로 했다.”고 주장했다. 즉, 북한 측의 판단기준은 과거의 선례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 측은 우리가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내세운 것을 두고 “해괴한 망동”이고 “무례무도의 극치”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회담 무산의 책임을 우리 측에 돌렸다.
이에 대해 우리 측은 “당국 대화가 무산된 것은 수석대표 급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다가 일방적으로 대표단 파견을 보류하고 무산시킨 북한 당국의 태도” 때문이라고 반박하며, “북한이 과거 남북회담 관행을 운운하고 있으나 과거 관행을 일반 상식과 국제적 기준에 맞게 정상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맞받아 쳤다. 우리 측 입장에서 보면 조평통은 우리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와 비슷한 기구이며, 더욱이 서기국은 조평통의 지도부를 행정적으로 보좌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서기국장을 우리의 장관급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 협상 北에 유리한 구도로 진행돼
결국 남북 양측은 상대방의 수석대표의 급에 대해 매우 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고, 자기 측의 대표와 동급인 대표가 상대방에서 나와야 회담의 격(格)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했다. 즉, 상대측의 대표가 자기 측의 대표와 급이 다르기 때문에 격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그 결과 회담이 무산된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북한은 지난 정부들에서 이루어진 남북대화의 관례를 내세었고, 우리는 북한 권력구조상의 공식적인 지위나 국제적 기준을 내세웠다. 그러면 남북대화에서 수석대표의 급과 격이 왜 이처럼 중요할까? 세 가지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수석대표의 급에 따라 남북대화에서 논의될 의제의 범위나 수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대표의 급이 낮으면 회담에서 다루어질 의제의 범위가 줄어들고 수준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의 광범위한 이슈들이 의제로 다루어지려면 대표의 급이 높아야 한다. 이에 비해 실무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인 문제들이 회담의 의제라면 굳이 고위급이 회담대표로 나설 필요가 없다.
이번 남북 당국회담에서 우리는 북한의 비핵화 이슈나 천안함·연평도 사건의 책임문제를 제기하고 싶어 했지만, 북한은 이러한 이슈들은 제외하고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관광 재개,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이슈들을 기술적으로 접근하기를 원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고위급 회담을 원했고, 북한은 그냥 당국회담을 원했다.
둘째, 양측 수석대표의 급에 있어서 차이가 나면 회담결과도 불균형하게 나올 가능성이 높다. 고위급 대표일수록 회담 성공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커지고, 협상타결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양보의 크기도 증가한다. 이에 비해 대표의 급이 낮아질수록 회담 결렬에 대한 정치적 책임도 줄어들고 협상타결을 위해 양보할 수 있는 여지도 좁아진다.
회담의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
또한 협상의 결과가 갖는 구속력도 고위급일수록 높고 급이 낮아질수록 낮아진다. 즉, 급이 낮은 대표의 협상결과는 고위 당국자에 의해 뒤집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협상의 구조를 감안할 때, 협상대표의 급이 다르면 협상의 결과가 고위급이 나온 측에 불리하게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고위급이 협상대표로 나가고 북한은 중하위급이 나오면, 우리에게 불리하고 북한에게 유리한 협상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남북협상이 대체로 북한에게 유리한 구도로 진행된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남북관계의 정상적이고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남북회담의 격이 맞아야 한다. 실무차원의 문제인지 고위 정치적 차원의 문제인지에 따라 회담에 나오는 대표의 급이 달라야 한다. 또한 중앙정부 차원의 회담인지 지방정부 차원의 회담인지 아니면 비정부 단체 차원의 회담인지에 따라 적합한 회담대표가 바뀌어 나와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이러한 원칙을 무시하고 조평통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회담의 격을 무시하고 항상 대표로 나온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우리가 회담을 위한 회담을 묵인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남북관계의 정상적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회담의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격식과 프로토콜을 중시하는 대통령의 성격이 잘 나타난 표현이다. 사실 회담의 급과 격은 회담의 의제설정에서 결과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남북한 간에도 이제 회담의 격식을 따져야 할 필요가 있다. 격이 맞지 않은 회담, 불평등한 결과를 가져오는 회담은 서로 간에 신뢰가 쌓이는 것을 막고, 남북관계가 항상 불안정한 상태에 머물게 만든다. 회담이 반복돼도 결과가 누적되지 않고 확산되지도 않는다.
회담 대표의 급과 격을 둘러싼 논란이 이번에는 남북한 간의 당국회담을 무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번을 계기로 남북한 당국이 앞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격식을 갖추어 회담에 임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면, 이번 사건이 오히려 정상적인 남북관계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정진영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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