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어요| “20~30대면 다 컸다고요? 아니거든요” 김경희 자유터 대표간사 2012년 3월호
만나고 싶었어요
“20~30대면 다 컸다고요? 아니거든요”
서울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인근에 자유터학교가 있다. 2003년 설립되어 20~30대 북한이탈 청·장년을 대상으로 한 야학이다. 이 곳에서 5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한 선생님이 있다. 목동 학원밀집가에서 영어강사로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나가다 난민학 연구를 위해 다 접고 훌쩍 유학길에 올랐고, 대학원 시절 탈북자 문제에 눈을 떠 졸업 이후 귀국하자마자 자유터학교에 합류했다.
모르는 것을 꼼꼼하게 짚어줄 땐 영락없는 영어 선생님이지만 취업 시즌엔 이력서를 들고 함께 뛰어주는 믿음직스런 선배 같은, 자유터학교 김경희 대표간사를 만나봤다.
언제 자유터학교에 오게 되었는지?
원래 제가 난민 문제에 관심 있었어요. 난민사회학을 하고 싶었고요. 중동의 난민 문제에 특히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거든요. 국내에서는 그 쪽으로 공부하기엔 정보도 많이 부족한 것 같고 해서 2004년도에 호주로 유학을 갔어요. 국제난민 쪽으로 전공을 잡았죠.
그런데 대학원은 사실 토론 중심이잖아요. 저희 학과에 독일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탈북자에 대해서 관심이 너무 많은 거에요. 무슨 말만 나오면 북한을 끄집어내 토론 주제로 삼고 말이죠. 학과에 한국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 교수님하고 학생들은 ‘얘가 뭐라고 하나’ 싶어 저만 쳐다보고 있었죠. 해외에 있어 보니, 외국인들에게는 북한의 기아, 탈북 이런 것들이 큰 이슈더라고요.
사실 우리의 문제인데, 외국 학생들보다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에 많이 창피했어요. 그때부터 학업의 방향을 틀어서 북한이탈주민 쪽으로 옮겼죠.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6년 12월에 돌아와서 이듬해인 2007년에 자유터학교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일을 하시는지?
기본적으로 자유터학교는 야학이니 오후부터 저녁시간까지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쳐요. 탈북자들이 많이 보는 웹사이트에 공고를 내거나 주변에 있는 하나센터, 복지관 같은 곳에 영어가 필요한 탈북자들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하죠.
근데 대부분 친구 소개로 연결되어서 많이 찾아 와요. 보통 하루에 참석하는 학생들이 평균 15~20명 정도 돼요. 제가 유학 가기 전까지 목동 쪽에서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해서 학생들에게 영어 강의를 하죠. 행정적인 면에서는 학생들 학업 스케줄 조정하고, 수준별 반 배정하는 일을 해요.
학생들 나이가 많던데?
탈북자 중에서 어린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요새 대안학교 많잖아요. 또 굳이 대안학교 아니더라도 일반학교에 가면 되거든요. 근데 자유터학교에 오는 탈북자들은 적어도 20세를 넘긴 학생들이에요. 많게는 30대 후반도 있죠. 10대 같은 경우는 시행착오를 하면서 진로를 결정할 수 있어요. 그런데 20~30대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희 학교에서는 진로지도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지도하고 있어요.
대학으로 가길 희망하는 학생들에겐 기초적인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도 하고요, 상담을 통해 취업활동을 추진하는 게 낫겠다 싶으면 전문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나 기관을 알아봐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죠. 그게 야학 이외에 자유터학교의 기둥이 되는 프로그램들이에요.
지원이 많이 필요할텐데?
그 문제가 사실 쉽지 않죠. 저희가 야학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사실 한국에서 야학이라는 건 옛날에 없어졌잖아요. 지금 남은 건 ‘방과후공부방’이란 개념뿐이죠. 야학이라는 개념으로 재정적인 것을 포함해서 외적인 교육지원을 받을 수 없으니 우리 학교 프로그램을 ‘방과후공부방’이라는 개념으로 잡고 지원신청을 해야 하는데, ‘방과후공부방’이라는 말을 들으면 당연히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막상 지원신청하면 20~30대들이 무슨 ‘방과후공부방’ 학생들이냐는 벽에 부딪혀요.
정부 쪽에서도 그렇고 민간 쪽 재단들도 무척 난감해합니다. 과거에 그런 전례가 없었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계속 지원이 어렵겠다는 통보를 받으면서 속상해 많이 울기도 했어요. 다른 학교들 보면 2~3명 모아놓고 공부하는 곳에도 지원이 되던 시기였는데 학생들 연령대가 높다고 지원이 어렵다던 말에 상처를 많이 받았거든요.
사실 우리 정부가 탈북자들의 입국 연령을 제한하고 있지 않잖아요. 현재 입국하고 있는 탈북자들 상당수가 20~30대 들이에요. 현실적으로 20~30대 탈북자들의 교육을 지원하는 방법은 그 나이에 맞는 교육기관인 대학교를 보내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그 연령대의 학생들이 대학교에 입학해서 다른 남한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무리 없이 학습해 나갈 수 있느냐는 거에요. 무리라는 거죠.
북쪽에서 쓰던 언어도 다르고, 오랜 탈북기간 때문에 학습도 정체되어 있고요. 총체적으로 기초학력이 너무 떨어지는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대학교에 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보통 적응을 못해요
. 그러니 우리는 그 공백을 메워 정착을 돕겠다는 건데, 제도적으로 지원이 쉽지 않아 어려운 상황이에요. 그래도 최근에는 탈북자 교육지원과 관련한 시각이 10대 위주에서 20~30대 쪽으로 많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라 기대를 걸어보고 있어요.
탈북자 인턴십 프로그램이 있다던데?
네. 기업들과 연계해서 진행해나가고 있죠. 대학생 신분으로 찾아오는 탈북 학생들, 특히 졸업을 앞둔 4학년들에게는 인턴십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줘요. 기업에 가서 기업문화를 접해보는 거죠. 그러면 학생들이 스스로 얼마나 부족한지, 졸업 전까지 어떤 부분을 더 개발해야 하는지, 졸업 전에 정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거든요.
지금 함께 하고 있는 기업이?
아직 시작 단계라 많지는 않아요. 일단 벽산엔지니어링이랑 인턴십 프로그램을 함께 하고 있어요. 언젠가 벽산 회장님께서 자유터학교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하신 적이 있었어요. 그 때가 마침 저희 학교 학생들이 막 대학을 졸업하던 시기였는데 취직이 쉽게 되지 않는 거에요.
대놓고 취직을 좀 시켜달라는 말은 못하겠고, 그래서 기업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한 거죠. 벽산 그룹 측에서도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해서 처음엔 2명씩 시작을 했어요. 지금은 여름과 겨울, 1년에 두 번씩 각 10명이 인턴십에 참여하고 있죠. 벽산 그룹 측에서 저희 학교로 인턴십 학생들에 대한 1주일 보고서를 보내줘요.
그거 보면 학생들이 뭘 했고 뭘 배웠는지 다 나와요. 실제 인턴 급여를 받고 일을 하면서 남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직접 현장에서 보는 거죠. 이런 것들이 교실 안에서 사회생활은 이런 거라고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생동감 있죠.
수료하고 만나보면 세상 보는 눈이 정말 많이 달라진 것을 느껴요. 이게 또 계기가 되어서 작년에는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하고 한국청년정책연구원과 같은 기관에서도 인턴십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고 있어요. 작년에 총 50명이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니 처음보단 정말 많이 발전한 거죠.
제일 견디기 힘든 것?
우리 학생들 볼 때 ‘다 컷네’ 하는 시선으로 보세요. 사실 다 큰 거 맞긴 맞아요. 겉으로 보면 멀쩡하게 보이는 그냥 성인이잖아요. 하지만 여명학교나 셋넷학교의 어린 10대 탈북 학생들처럼 우리 자유터학교 학생들도 남한 사회 모르는 건 똑같아요.
우리가 쉽게 쓰는 말, 신데렐라 콤플렉스? 이런 말 몰라요. 피터팬 증후근? 피터팬이 누군지 모르거든요.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 ‘선생님, 저 조그만 사람들 누구에요?’ 이래요. 이런 학생들을 나이만 찼다고 어떻게 사회에 바로 내보내요.
신체만 컸지, 정말 초등학생 가르치듯이 교육을 받아야 하고요, 교육적인 측면에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줘야 돼요. 남한 사회의 따뜻한 어른들의 지도도 받아야 하고요. 20~30대 탈북자들의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성인이니까 경제적 구성원으로 참여시켜야겠다’라는 게 아니라 ‘이 사회의 건강한 한 명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기초적인 교육을 먼저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겠다’라는 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전 20~30대 탈북자는 아직도 충분히 꿈을 가질 수 있는 나이라고 봐요. 본인이 어떤 삶을 살았던 간에 꿈을 버리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계속할 겁니다. 교육지원이나 진로상담, 취업지원 같은 자유터학교 프로그램을 계속 키워나가고 싶고요.
기억나는 학생?
저희 학교에서 공부했던 여학생이 있는데요. 얼마 전에 남한 남자와 결혼 했죠. 한 달 정도 되었을까, 학교로 찾아 온 거에요. 딸기며 떡이며 몇 박스씩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왔더라고요. 제가 “우리 애들 얼마 많지도 않은데 아깝게 뭘 이렇게 많이 사왔니?” 물었더니 “선생님, 여기가 제 친정이잖아요.” 이래요.
정말 뭉클하더라고요. 보통 결혼하고나서 처음으로 친정 갈 때 그렇게 많이 준비해서 가곤 하잖아요. 그걸 보면서 많이 부러웠나 봐요. 그 학생이 남한에 친정이 없었거든요. 우리 학교를 친정이라 생각하고 신랑이랑 함께 찾아와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어요.
이동훈/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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