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3년 10월 1일 0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 이동표 할아버지 “내 그림은 통일이 돼야 끝나” 2013년 10월호

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9
이동표 할아버지  “내 그림은 통일이 돼야 끝나”

TS_201310_57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누나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미리 설명을 들은 그 집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두 번째 집이 바로 누나가 사는 집이구나.’ 조금씩 가까워지는 순간, 그 앞에는 한 여자가 서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로를 바라만 보았다. 우리는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누나, 나 동표야.” 이 한마디를 쏟아내고 참아왔던 설움이 왈칵 흘러 내렸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자 온 동네 사람이 몰려들었다.

통일이다 고향가자 Ⓒ연합뉴스

통일이다 고향가자 Ⓒ연합뉴스

인생사 한치 앞도 모른다지만 이런 드라마가 또 있을까. 실향민 모임에서 만난 지인은 작은 누이가 서울에 살고 있다며 만남을 주선해주었다. 이동표 할아버지(81)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속 장소로 가보았지만 누이는 나오지 않았다. 동생은 죽었을 거라며, 혹시나 살아 있다 해도 여기 있을 리가 없다며 괜한 희망을 갖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리워했던 동생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믿지 않을 수 있을까. 20년 세월을 어찌 하룻밤 사이에 다 이야기 하겠냐 만은 남매는 하나씩 하나씩 그간의 세월을 터놓았다. 누이는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30분 거리에 살며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던 미안함과 그간 홀로 지냈을 동생의 고생에 대한 안타까움, 자신도 혼자라 여겼던 서러움이 뒤섞여 복잡한 감정을 만들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이는 당장 네가 사는 집으로 앞장서라고 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동생이 어떻게 살았는지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자 이 여인은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 머리맡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6·25전쟁-피난행렬은 전장을 뚫고 Ⓒ연합뉴스

6·25전쟁-피난행렬은 전장을 뚫고 Ⓒ연합뉴스

30분 거리 살면서 알아보지 못했던 누이

“형제가 오래 지내다 보면 의가 상할 수도 있잖아. 근데 난 아니야. 누이한테 막 대하지 못해. 내 곁에 남은 유일한 형젠데.” 할아버지는 떨어져 있는 아픔을 알고 나서 다시 찾은 누이를 일상의 사소한 다툼으로 잃고 싶지 않다고 했다. 누이가 섭섭해 하는 일이 있으면 항상 먼저 사과하고, 이해하려 애쓴다. 지금은 자신보다 아내가 누이를 더 챙길 정도로 가깝게 지낸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묻어있다.

황해도 벽성군에서 유난히도 그림을 잘 그리던 아이는 화백이 되고 싶었다. 그는 당시 하나밖에 없던 해주 예술학교로 유학을 가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1년이 좀 지났을까. 6·25전쟁이 발발했다. 할아버지는 인민군에 끌려갔다 간신히 탈출하였고, 집으로 가기 위해 남쪽으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가다보면 언젠가는 고향이 나오리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국군에 발각되어 포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는 고향을 찾지 못했고,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을 목도하며 전쟁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가슴 속 깊이 박혔다.

할아버지에게는 친누이 두 명과 이복동생 넷이 있다. 친어머니는 할아버지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고 그들은 의붓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의붓어머니는 친어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셨지만 유독 세 남매가 끈끈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유년시절을 보내고 큰 누이는 이남으로 시집을 갔다. 하지만 38선이 그어지기 전, 통일이 될 것 같다며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갔고 영영 다시 만날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반면 작은 누이는 서울에 남기로 결정해 할아버지와의 재회가 이뤄질 수 있었다. 그렇게 운명의 갈림길 속에서 큰 누이와 작은 누이와의 만남과 이별이 갈렸다.

평양 형무소 화재 Ⓒ연합뉴스

평양 형무소 화재 Ⓒ연합뉴스

“고향에 돌아가서 죽고 싶어. 연어처럼”

“죽기 전에 누이 한 번 만나면 소원이 없겠어.”라며 설명해주는 할아버지의 그림에는 항상 ‘어머니’와 ‘전쟁’이 등장했다. 그에게 어머니는 고향이자 8살 터울의 큰 누이다. 사랑으로 안아주고 걱정하고 동생을 위해 희생하던 누이의 모습은 모성에 대한 갈망을 채워 주었다. 또한 찬란하던 젊은 날, 전쟁 속에서 느껴야 했던 아픔과 상처가 늘 화폭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늘 어두웠다. 하지만 80세를 전후해 화풍에 대전환이 있었다. “6·25부터 현대사를 쭉 그렸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통일이 돼야 그 끝이 나겠더라구. 실향민이 집에 돌아가야 이야기가 끝나지 않겠어?” 현재 할아버지는 통일에 대한 미래를 그린다. 그래야만 이 아픈 이야기가 끝이 날 것 같다. 또한 그의 그림에는 유독 안아주는 장면이 많이 등장했다. “포옹은 만남을 뜻해. 만나야 안아줄 수 있잖아. 남북이 하나되고 서로 안아주는 것을 그리고 싶어.”

지난 6월, 이동표 할아버지는 미국 국방부 한국전쟁 기념전시관에 작품 4점이 영구 전시·보존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정전 및 한·미동맹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관에 그의 그림이 소장된 것은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역사적 의미의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가능했던 것이다. 자신의 평생의 한이 응집된 그림을 더 많은 사람들이 나눌 수 있도록 한 것에는 모두가 그때를 잊지 않기를 바라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

고향가자 Ⓒ연합뉴스

고향가자 Ⓒ연합뉴스

그는 모든 캔버스에 ‘실향민 이동표’라고 서명한다. 고향을 잃은, 가족을 잃은 그의 삶이 모든 그림 속에 녹아 있다. “내 그림은 죄다 환상적이야. 항상 고향에 가거든. 고향에 돌아가서 죽고 싶어. 연어처럼.” 한적한 양평군 어느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그는 이곳이 고향을 닮아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앞에는 저수지가 있고,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고향과 꼭 닮아 있다. 하지만 이곳에 살수록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더욱 커질 뿐이었다. 언제쯤이면 그의 그림처럼 고향으로 돌아가 헤어졌던 가족과 재회하는 환희를 느낄 수 있을까.

그는 허락된 시간동안 더 많은 통일 미래를 그리고 싶다. 이동표 할아버지는 오늘도 역사의 질곡에 색을 입힌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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