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유산 톡톡! | 대륙을 호령한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 2013년 10월호
북한 문화유산 톡톡! 9 | 대륙을 호령한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
고구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아련한 이름이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이미 대부분의 독자들도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다양한 전문서적들과 드라마·영화 등을 통해 상세한 내용들까지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전성기는 제19대 광개토대왕(391년~412년)과 제20대 장수왕(421년~491년) 때이다. 광대토대왕은 대규모 정복 사업을 통해 현재의 만주지역 일대와 한반도의 한강유역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이후 장수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진 정책을 펼쳐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또한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과의 계속된 전쟁에서 승리하며 중원세력이 한반도를 넘보는 것을 막아내어 사실상 우리 민족의 방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고구려는 제28대 보장왕을 끝으로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평양성, 동아시아 강국 고구려의 상징
평양성은 졸본성과 국내성에 이은 고구려 세 번째 수도이다. 4세기부터 고대국가로의 체계를 정비한 고구려는 5세기 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영토 확장을 통해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활한 영역을 지배하게 된다. 하지만 국내성은 기존 귀족세력의 근거지로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수도로의 천도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장수왕 재위 기간 중 새롭게 등장한 북위는 고구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왔다. 또한 한반도 한강유역과 그 남쪽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백제와 신라 역시 항상 고구려의 뒤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이러한 복잡한 국제정세를 고려한 국가전략의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평양성은 현재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평양직할시 중구역, 평천구역에 자리한다. 장수왕 15년(427년) 평양 천도 당시 왕궁은 대성산성과 안학궁이었다. 평양성은 크게 궁성인 내성(內城), 관청이 있었던 중성(中城), 백성들의 거주구역인 외성(外城), 내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던 북성(北城) 등 4개 구역으로 구획되어 있다. 외성, 중성, 내성에는 각각 4개의 성문이 있고, 북성에는 남문과 북문을 두었다. 몇 개의 성문은 북한의 국보유적으로 관리되고 있는데 중성의 서문인 보통문은 국보유적 제3호, 내성의 동문에 해당하는 대동문은 국보유적 제4호, 내성의 북문인 칠성문은 국보유적 제18호, 북성의 남문인 전금문은 국보유적 제22호로 지정되어있다. 또한 성내에는 7개의 장대를 두었는데 국보유적 제19호인 내성의 을밀대와 국보유적 제21호인 북성의 최승대가 유명하다.
고구려의 평양 궁궐은 안학궁? 청암리토성?
평양성의 중심인 궁궐은 ‘안학궁’으로 불렸는데 북한의 국보유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평양직할시 대성구역 안학동에 위치한다. 양원왕 8년(552년) 새롭게 조성한 장안성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왕성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배후에는 대성산성을 축조하여 평지성과 산성이 어우러져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도성체제를 보여주고 있다. 궁성은 한 변의 길이가 622m, 둘레 약 2.5㎞, 넓이는 38만㎡이며 남궁·중궁·서궁·동궁·북궁의 다섯 구역으로 나뉘며 3개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다. 1958년 첫 발굴이 시작된 이래로 현재까지 모두 52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고구려가 5세기 무렵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평양도성의 궁성에 대한 의견은 북한과 일본 학자들 간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현재 군사적 성격의 방어성이 대성산성임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한다. 하지만 평지성의 경우 북한측이 주장하는 안학궁설과 일본측이 주장하는 청암리토성설로 대립되고 있다. 특히 일본학자들의 경우 안학궁의 시기를 일부 출토유물을 근거로 고구려 말 또는 고려시대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에 의해 발굴조사되어 공개된 자료 역시 일본측의 주장을 부정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부분이 많아 아직까지도 안학궁설과 청암리토성설의 대립은 진행중인 상태이다.
이러한 논쟁을 의식해 지난 2000년대 중반에는 안학궁에 대한 남북공동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아직까지 논란에 대한 종지부를 찍지 못한 상태이다. 안학궁과 관련된 논쟁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작업으로 보다 정확하고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이 길어져 평양천도기의 고구려 도성에 대한 역사적·고고학적 정립이 늦어진다는 점에서는 고구려사 연구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일전에 만났던 어느 중국연구자가 “안학궁은 고구려 시대의 유적인가? 아니면 고려 시대의 유적인가?”라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그 물음에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없어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러한 두 설에 대해 현재로써는 명확하게 답을 내기란 어려울 듯하다. 혹여 답을 낸다고 하더라고 지금과 같이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조사자료가 부족한 상태라면 지금까지의 논란을 확대시키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양의 안학궁과 청암리토성은 모두 북한에 위치한 유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적들이 가지는 역사성은 남과 북 모두가 공유하고 있음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평양지역의 문화유산을 남과 북이 공동으로 보존·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면 안학궁-청암리토성 논쟁을 종결짓기 위한 체계적 조사가 다시 한 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박성진 /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사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