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리의 스케치北 | 치밀한 묘사와 대범한 생략의 공존 2013년 10월호
박계리의 스케치北 22 | <박연폭포> 치밀한 묘사와 대범한 생략의 공존
개성공단 재가동 소식이 반갑다. 이산가족 행사와 관련해 시끄러운 요즘, 관광지에 가면 심심찮게 보였던 미술작품 판매소들이 생각난다. 금강산관광을 갔다가 미술품 판매소에서 자신의 작품을 팔고 있던 화가들을 만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북한의 최고 미술대학인 평양미술대학교 출신이라고 밝히는 화가들을 필자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 화가는 자신의 작품 앞에 붙어 있는 작가 얼굴 사진 앞으로 날 이끌었다. 약력이 적혀있는 글 위에 붙어 있는 사진 모습 그대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금강산에서, 이런 초라한 판매소에서 평양미술대학교 출신 화가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곤 상상치도 못했던 내가 그들에게 “평양미술대학교에서 무슨 과를 나오셨어요?” 하고 묻자 대뜸 돌아온 대답은 “조선화, 유화 다 그릴 수 있습네다.”였다. 당신이 무엇을 주문해도 다 그려줄 수 있다는 그들의 표정을 통해 ‘미술품은 더 이상 선전선동을 위해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외화벌이의 수단이구나’ 하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미술품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면, 아무리 순수미술이라고 하더라도 시장의 취향에 민감해지기 마련이다. 미술가들은 콜렉터, 미술 비평가들의 발언 등 미술품의 가격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에 예민해지기 쉬우며, 때로는 그것이 어떠한 작품 경향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미술가들에게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게임이다.
선우영, 치밀하게 그리는 세화기법의 대가
우리 미술시장에서 부각된 북한의 미술가로 선우영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평양에서 출생하여 평양미술대학 산업미술학부를 졸업했다. 선우영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은 원래 회화를 전공하려고 했으나 경공업대학에서 미술대학으로 편입하게 된 관계로 산업미술을 전공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졸업 후 중앙미술창작사에서 유화를 그리게 되었고, 1972년 이후 조선화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조선화가로 변신한다.
당시 조선미술가동맹에서는 조선화를 기본으로 우리 미술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킬 것에 대한 당의 방침을 관철하기 위해서 중앙미술창작사에 조선화 강습시간을 따로 마련하였다. 강사는 당대 최고의 조선화가이며 평양미술대학교 교수였던 정종여가 맡았다. 당시 강습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던 선우영은 1973년 이후부터는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에서 조선화 화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정창모가 몰골법에 의한 대범한 화면이 특색이라면 이와는 반대로 선우영은 현미경을 보고 사물을 그리듯이 치밀하게 그리는 세화기법의 대가로 유명하다. 물론 그의 화면에 그려져 있는 모든 대상물을 전부 꼼꼼하게 그리는 것은 아니다. 치밀하게 그리는 부분과 대범하게 생략하는 부분이 공존하는 구성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의 작품은 주제를 화면 가까이 배치하여 강조한다. 앞부분에 배치하기 때문에 당연히 크고 진하게 그려진다. 이렇게 강조된 부분을 세밀한 붓으로 세부까지 꼼꼼히 그려내는 것이 선우영 화면의 특징이다. 회화를 직관적인 예술로 파악한 선우영은 감상자가 자신의 작품을 보았을 때 직관적으로 이들의 눈을 사로잡아야 하며, 자신의 작품에 사로잡힌 이들이 작품을 보면 볼수록 새로운 미를 더욱 더 느낄 수 있어야 작품의 생명력을 잃지 않게 된다고 생각했다.
<박연폭포>를 보면 화면을 보자마자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맨 앞의 바위다. 거대한 바위의 육중함에 시선을 뺏기면 그 세부의 치밀한 묘사에 한동안 감탄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곧 시원한 폭포에 눈이 간다. 폭포가 떨어지는 곳의 물의 흐름은 서양화에서 대상을 입체적으로 묘사할 때 사용하는 기법들이 사용된 듯 사진을 찍은 것과 같은 볼륨감이 현란하다. 그러나 그 뒤쪽을 보면 수풀과 하늘이 매우 평면적으로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점점 멀어져 아스라이 사라지는 원경의 모습이 아니라 평면적인 하늘이 툭 막힌 듯 펼쳐져 있다.
이러한 구성이 선우영의 화면이 갖는 특징 중 하나다. 전통적이면서 동시에 서구적 기법을 구사하고 있고, 매우 치밀하면서 동시에 대담하게 생략되며,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세련된 화면을 구축해낸다. 이러한 개성은 그가 화가로서 성장한 독특한 이력이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경공업대학을 다닐 때 보석공예작업을 하면 의례히 확대경을 보면서 작업했던 과정에서 연마된 섬세한 기술, 이후 유화를 배우고 다시 조선화를 배웠던 그의 긴 과정이 독창적 화면을 창조해낸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선우영 작품을 보고 있으니, 유화와 조선화를 다 그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 금강산에서 만난 그의 후배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화폭이 선우영을 넘어 또 다른 창의적인 방향으로 추동될 수 있기를 바란다.
박계리 / 한국전통문화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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