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 박봉태 할아버지 “건강하게 살아서 꼭 만나고 싶어” 2013년 12월호
2013 IPA&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공동캠페인 | 힐링일천만, 이제는 만나야 한다 10
박봉태 할아버지
“건강하게 살아서 꼭 만나고 싶어”
“건강!” 그는 평범한 인사 대신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반겨주셨다. 박봉태(89) 할아버지는 벌써 30년이 넘게 매일 아침 줄넘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1989년 1시간당 1만4천628번, 4시간에 3만7천414번의 줄넘기로 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 “인명제천이니까 오래 사는 건 바라지 않지만, 그저 죽는 날까지 건강하고 싶어.” 할아버지가 유달리 건강을 챙기는 이유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평안북도 희천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는 얼굴마저 희미하다. 그렇게 홀어머니는 4남매를 길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딸과 아들 하나를 먼저 보냈다. 이제 남은 건 큰 아들과 6살이던 할아버지였다. 세 식구는 서로 의지하며 단란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한반도에 닥친 불행한 근현대사는 세 가족에도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내가 나쁜 놈이요. 북에 두고 온 처와 자식이 있소.”
큰 형님은 이념적인 문제로 인민군에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께 남은 것은 막내아들뿐이었다. 기관사가 된 막내아들은 일찍 결혼하여 어머니께 손녀딸까지 안겨주었다. 이제 더 이상의 비극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기차는 주요 폭격 대상이었다. 그날도 할아버지가 몰던 기차는 폭격에 노출되었다. 다행히도 같이 일하던 사람들과 방공호에 숨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하나 남은 아들마저 잃었다는 생각에 결국 화병으로 먼저 떠나셨다. 가족들을 모두 먼저 보내고 그의 품에는 아내와 돌도 채 되지 않은 딸이 하나 남았다. 하지만 세상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하다. 집에 돌아가면 늘 방긋방긋 웃으며 반겨주던 딸이 그날따라 유난히 울어댔다. 이별은 예상치도 못했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일하러 갔던 것뿐인데 어쩌다 보니 이남까지 오게 되었다. “말은 못하지만 다가올 운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 그 날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라는 걸 알았던 걸까? 할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홍옥이는 빨간 사과를 생각하며 지은 이름이야.”
그렇게 홀로 남한에 정착하게 된 할아버지는 언젠가 딸과 재회하리라 믿으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갔다. 가진 것은 건강한 몸뿐이었기에 닥치는 대로 기술을 익히며 자격증도 11개나 취득했다. 운전도 배워 자원입대를 했고, 사단장의 운전병이 되었다. 사단장은 성실하고 유쾌한 그를 아껴주었고, 좋은 배필도 소개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결국 털어 놓고 말았다. “내가 나쁜 놈이요. 사실 북에 두고 온 처와 자식이 있소.” 아내는 충격이 컸을 테지만 그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할 수 없지요. 대신 한 가지 약속해주세요.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면 성인이 될 때까지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하고 20년이 넘는 시간을 언제나 죄인처럼 가슴 속 한 구석에 응어리를 안고 살았지만 할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아들 셋을 낳았고, 남쪽에서 만든 새로운 가족이란 울타리에 안정과 행복을 느껴갔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은 전국을 눈물로 휩쓸었다. 할아버지가 이북의 딸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조용히 신청서에 ‘박홍옥’ 딸 이름 석자를 써내려갔다. “아버지, 딸이 있었어요?” 아들이 갑작스레 물어왔다. 그는 당황하여 “형님 딸, 조카 딸이지.”라고 둘러댔다. 아버지가 되어 딸을 부정한 꼴이 되었지만, 아직 아들이 학생이었기에 사실을 말해줄 수 없었다. 평생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도 미안한데 딸의 존재마저 말할 수 없는 마음은 표현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아이들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누이이지만 그 존재를 점차 이해해주려 노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딸에 대한 그리움은 배가되었다. 할아버지는 우연히 알게 된 조선족 여인을 수양딸로 삼았다. 그녀는 홍옥이와 같은 나이었다. 서로 수십 차례 편지를 나누며 정을 쌓아갔고, 수양딸은 이북에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백방으로 알아봐 주었다. 그녀가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이북의 아내는 이미 광부에게 재가했고, 딸은 다른 지방으로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였다. 몇 십 년을 안고 산 그리움과 미안함이 조금은 덜어졌다. 하지만 또 다른 아픔이 그에게 안겨졌다. 홍옥이는 더 이상 박홍옥이 아니었다. 새 아버지의 성을 따라 다른 홍옥이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딸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곁에 있어주지 못해 생긴 일 같아 서글퍼졌다. 이러한 사실이 이산가족상봉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이산가족 신청은 직계가족이 우선인데 성까지 바뀐 홍옥이가 내 딸이라는 증거가 없어. 상봉신청에서 번번이 떨어지는 이유도 그게 아닐까?” 할아버지는 홍옥이가 건강하게 살아있음에 위안을 삼기도, 또 다시 아파하기도 했다.
현재 할아버지 곁에 있는 가족의 존재는 삶의 이유이다. 또한 할아버지의 집은 이제 이곳, 서울이다. 남부럽지 않게 자란 세 아들과 죄 많은 자신을 받아준 심성 고운 부인이 있다. 하지만 행복할수록 딸에 대한 미안함도 커져갔다. “홍옥이는 빨간 사과를 생각하며 지은 이름이야. 건강하게 살아 죽기 전에 꼭 만나고 싶어.” 해죽해죽 웃는 모습이 빨간 사과를 닮았던 그 아이는 이제 60세가 넘은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홍옥이의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건강!” 헤어질 때도 할아버지는 이렇게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다.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건강해야 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 그래야 딸에게 용서를 구할 수도, 원망 섞인 눈물을 닦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목이 메여 마음 놓고 불러 보지 못한 그 이름, 행여나 누가 들을까 가슴 속으로만 되뇌던 그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줄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나 할까. 뼛속까지 사무친 그리움 속에 오늘도 박봉태 할아버지는 줄넘기를 돌린다.
선수현 /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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