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유산 톡톡! | ‘보수·복원’ 대신 ‘개건’된 왕건왕릉 2013년 12월호
북한 문화유산 톡톡! 11 |‘보수·복원’ 대신 ‘개건’된 왕건왕릉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하고 통일국가 고려를 건국한 인물이다. 877년 송악군의 사찬인 왕륭의 아들로 태어나 한반도 중부지역을 석권한 궁예의 부하가 되어 서해안 일대를 비롯하여 경상남도까지 공략하는 등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 시중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나 궁예의 폭정과 위협에 반기를 들어 휘하 장수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태봉국의 수도 철원에서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다. 이후 다음해인 919년에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가 있는 지금의 개성일대인 송악으로 옮겼으며 궁성을 송악산 아래에 자리하도록 하였는데 그 곳이 현재 만월대로 불리는 고려궁성이다.
고려, 미완의 민족통합 최종 해결
이후 왕건은 신라를 포용하는 정책을 통해 935년에는 신라를 흡수하였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삼한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또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936년 거란에게 멸망당하자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10만에 달하는 발해의 유민을 포용하여 통일신라 혹은 남북국시대로 불렸던 미완의 민족통합을 최종적으로 해결하였다. 하지만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한 고려에게는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할 만한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고려의 영역으로 통일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기로 했다.
삼한통일과 민족통합을 이루어낸 왕건은 943년 국가의 기틀이 어느 정도 세워진 즈음 세상을 떠났다. 현재 왕건과 부인 신혜왕후가 합장된 현릉(顯陵)은 개성 남대문에서 약 3.5km 가량 떨어져 있는 개풍군 해선리에 있다. 본래 현릉은 송악산 서쪽 파지동 남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는 현릉이 잦은 전란으로 인해 3번 가량 이장된 것 때문일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몽골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태조의 능을 함께 강화로 옮겼으며 몽골과의 강화 이후 개성에 다시금 안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태조 왕건이 안장된 최초의 현릉 모습은 현재 살펴 볼 수가 없는 상태이다.
문화재를 ‘고쳐서’ 세운다?
현릉은 1993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석실구조로 이루어진 현릉의 매장주체부는 전면에 석실로 진입하기 위한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끝에는 석실이 자리한다. 석실은 화강암의 판석을 이용하여 사방의 벽을 만들었는데 석실의 상부는 단을 두어 좁힌 뒤 천장돌을 올렸다. 석실 바닥의 중앙에는 관대가 자리하는데 관대의 좌우로 벽과 맞닿게 설치한 부장을 위한 단이 설치되어 있다. 석실의 네 벽면과 천장에는 벽화가 그러져 있는데 당시에는 동서벽의 벽화만이 확인될 정도였다고 한다. 동벽에는 매죽도(梅竹圖)와 청룡의 꼬리 부분이 남아 있으며 서벽에는 노송도(老松圖)가 벽면 전체에 그려져 있으며 매화와 백호의 모습도 확인된다. 북벽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현무도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천장에는 별자리 그림이 그려진 것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현릉 벽화의 그림을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라고 하는데 현릉과 같이 연대가 명확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현릉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1년 전인 1992년 능역의 확장을 위한 공사 중 청동제 왕건좌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은 지난 2006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북녁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전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그렇지만 이와 같던 현릉의 모습은 1994년 북한의 대대적인 개건(改建)으로 인해 현재와 같이 변형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개건 작업은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적 정통성을 알리기 위한 작업으로 보여지는데 이를 위해 기존 유적의 형식을 어느 정도 유지한 상태로 단어의 의미와 같이 ‘고쳐서 세우는’ 작업들이 이루어 졌으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단군릉과 동명왕릉도 포함된다. 필자도 우연한 기회에 왕건왕릉 즉 개건된 현릉을 실견하였다. 남한의 문화가 ‘개건’보다 ‘보수·복원’에 익숙해서인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개건이라는 단어가 생소할 뿐이지 넓은 의미로 복원이라는 범주에 포함될 듯하다. 왕건릉의 개건과 관련해서 ICOMOS는 ‘조상 숭배 행위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여 금년 세계유산 등재 시 문제로 지적하지 않은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왕건왕릉은 금년 6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의 12개 유적군에 포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개건’이라는 단어가 주는 생소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남북한 모두가 문화재의 보존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가지게 될 때는 언제쯤일까?
박성진 /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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