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리의 스케치北 | 한상익, 강렬한 색채로 옮긴 삼천리 금수강산 2013년 12월호
박계리의 스케치北 24 | 한상익, 강렬한 색채로 옮긴 삼천리 금수강산
살아 꿈틀거리는 화면이다. 생명의 기운이 줄기 끝까지, 작은 꽃잎의 꽃술까지 뻗어 있다. 실은 시들기 직전까지 꽃잎의 작은 이파리, 가느다란 줄기 하나에도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는데, 그 당연한 진리가 화면으로 살아나자 무척 낯설다. 경이롭다. 한 눈에 황홀하다가 계속 들여다보니 그 기운에 섬뜩해진다. 화사한 만개는 시들음을 내포하고 있고, 생명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까.
프랑스어로 된 화집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보자마자 한동안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던 작품 <국화>. 이 작품을 보았을 때의 느낌처럼 화가 한상익의 삶도 명암이 공존하며 만개해갔다.
1917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한상익은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한다. 당시 서양미술의 여러 작품들이 서적을 통해 소개되고 있던 도쿄에서 화가는 루소, 밀레 등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풍부한 색채의 매력에 눈뜨게 된다. 귀국 직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특선을 받으며 성과를 냈고, 곧 해방이 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알려져 있다.
북쪽에서의 활동도 순조롭게 시작된 듯 보인다. 1947년 제1회 국가미술전람회에서 문학예술상 2등상을 수상했고, 1950년에는 북한 최고의 미술대학교인 평양미술대학 교수가 된다. 그러나 제2회 국가미술전람회에서의 낙선은 이후 그의 굴곡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의 낙선 이유는 ‘형식에 치우친 작품’이라는 평가 때문이었다.
색채 대조만 강조한다는 편향성 비판 한몸으로 받아
“변화무쌍한 자연의 색채, 그 속에서 진정으로 아름답고 고상한 색채를 찾아내어 나의 것으로 만들리라. 색을 떼어놓고 유화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처럼. … 이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나에게서 그 어떤 개인적 문제란 있을 수 없다.”
1989년 개인전 준비를 앞두고 자신의 창작생활을 회고하며 이야기하였던 화가의 지향점은 실은 도쿄 유학기부터 그가 추구해왔던 목표였다. 그의 작품들은 1950년대까지는 미술계에서 받아들여졌지만, 1960년대 들어오면서 주제보다 형식적 측면을 중시하면서 주관주의로 나아갔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하였다. 형상과 색채의 대조를 강조하는 데만 치우치는 편향의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상익은 창작적 개성의 문제, 조형적 형상과 형식 문제에서 새로운 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미술계에 물의를 일으켰다.
당시 미술가동맹 유화분과 위원장이었던 오택경은 한상익에 대해 “일단 작품을 내놓을 때 남의 의견을 참고하였으나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상반되는 주장과 의견들에 머리를 수그리지 않았다. 그는 오직 현실에만 머리를 수그릴 뿐이었다. 현실은 그의 스승이었다.”고 증언했다.
결국 한상익은 평양미술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두게 되었고, 홍성군 고저수산사업소, 고산군 광영 공예품 공장 등지에서 일하면서 창작활동을 지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삶은 1984년까지 약 14년간 지속된다. 북한 미술계는 “중견미술가로서 화단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로 보아, 다른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방법에 확고히 의거하여 창작생활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한상익은 때론 만사를 제쳐놓고 금강산에 들어가 1년에도 몇 달씩 현지 창작을 하곤 했다. 이러한 금강산에서의 현지 창작은 그가 일본 유학시절부터 지향하고 있었던 색채미의 탐구와 조형적 형상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보다 성숙하게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990년대 들어와 북한 미술계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리석호와 같은 사의적인 풍경화들을 받아들이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 1991년 김일성이 그가 금강산에서 작업한 <국화>를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을 선명하고 간결함을 토대로 한 조선화와 비교하면서 조선적인 유화로 높게 평가한다. 이어 1992년에는 그의 작품 200여 점으로 국제문화회관에서 개인전람회가 개최된다. 북한에서 개인전람회는 잘 개최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복권된 위상을 추측해볼 수 있다.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 삼천리 금수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형상화해보자.”는 그의 노력은 섬세한 필치와 단단한 소묘력과 결합되어 <국화>로 우리 앞에 있다. 꿈틀거리는 국화에 화가의 삶이 자꾸 겹쳐진다. 한상익은 1997년 눈을 감는 날까지 강원도 미술창작사에서 작업을 지속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박계리 / 한국전통문화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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