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순수한 애국심으로! 뜨거운 열정 지난 영원한 청년 2015년 11월호
인터뷰 | 이철승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 대한민국헌정회 원로회의 의장
순수한 애국심으로! 뜨거운 열정 지닌 영원한 청년
소석(素石) 이철승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스스로를 “구세대의 막둥이, 신세대의 맏형”이라고 칭하는 그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기록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의 시작과 발전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현장의 중심 속에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지난 7월 6·25 참전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학도의용군을 창설하여 6·25 전쟁에 참전한 지 꼭 65년 만이다.
일제하에서 불의를 참지 못하던 소년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꼭 닮아 있었다. 그는 일제가 강요하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고 일본인에게 괴롭힘 받는 친구들을 도우며 항거하는 의로운 학생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언제나 일제의 감시대상이었지만, 갖은 불이익과 수차례 퇴학 위기에도 굴하지 않았다.
1945년 조선은 독립을 맞이한다. 학병으로 차출되어 오사카에 자살특공대로 끌려갔던 그는 일제의 무조건 항복 후 징병에 끌려갔던 한국인 학병, 징용자들과 함께 60톤의 밀선을 빌려 타고 여수항을 통해 조국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조국은 해방됐지만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해 12월 미·영·소·중 4개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5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거리에는 호외가 돌고 있었다. 탁치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그는 그토록 염원하던 독립을 손에 넣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빼앗길까 불안했다.
학생들을 소집했다. “전국 학생들과 손을 잡고 목숨을 바칠 각오로 완전 독립을 획득하자.” 이렇게 전국반탁학생총연맹이 결성됐다. 위원장 이철승 이름으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성명서가 뿌려졌다. 김구 선생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에 학생대표로 참석한 이철승 의장을 향해 “반탁운동은 제2의 독립운동이다. 백만 학도의 원군이 왔으니 반탁 독립투쟁은 승리한 거나 진배없다.”며 자주국가를 위한 전국적인 반탁운동 전개의 뜻을 확인했다.
민족의 환희를 선사한 1945년 한 해가 지났다. 1946년 좌익계는 신탁통치 반대선언 후 3일 만에 돌연 신탁통치 찬성입장을 표명했다. 좌우이념을 둘러싼 민족 내부의 갈등으로 광복의 빛이 흐트러져갔다. ‘탁치지지 결의’를 선동하던 좌익은 민족과 국가보다 소련 연방화와 공산주의를 우선시했다. 이념을 따지지 않고 ‘즉시 독립’, ‘절대 반탁’을 외치던 단합된 민족에 분열이 생겼다. 이에 학생 간부들은 반탁전국학생총연맹을 결성하고 이철승을 위원장에 선출했다.
이철승 위원장은 뜻을 넓혀갔다. 7월 전국학생총연맹을 결성했다. 전국 학생 대표 1천여 명을 앞에 두고 이승만 박사는 “여러분, 청년과 학도는 이 나라의 보배입니다. 이 나라의 운명은 젊은이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제군들과 같은 젊은이가 살아 있으면 이 나라는 살고, 젊은이가 죽어 있으면 이 나라의 장래는 없습니다.”라고 격려했다. 청년들은 결의에 차있었다. 38선 즉시 철폐, 탁치 절대 반대, 민주정부 수립, 독립국가 건립 등을 시대적 사명으로 여겼다.
이철승 의장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학생들의 반탁반공운동의 결과 덕수궁에 있던 미소공동위원회를 내보내고, 1948년 5월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그해 12월에는 유엔으로부터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합법정부임을 인정받았다. 이런 점에서 이철승 의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은 조선왕조 500년의 연장도 아니요, 상해 임시정부의 연장도 아닌 오로지 반탁반공운동의 승리로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계급·군번 없어도 나라 위한 마음만은 하나!
1950년 6월 25일, 아직은 모든 것이 불안정하던 그때 김일성이 남침을 감행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뜨거웠다. 날씨도 무더웠지만 청년들의 가슴도 끓어올랐다. 피난 대열에 섞여 도착한 대전에서 이철승 위원장은 과거 반탁반공건국운동을 함께했던 전국학련 동지들을 중심으로 학도의용군 창설에 나섰다. 밤새워 수백 장의 격문을 써서 요소요소에 붙이고 학도들의 총궐기를 호소했다. 피난 중이던 학련 동지들은 속속 집결했다. 하지만 군에서는 “기존 부대를 재편성하기도 어렵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조국을 위해 결성된 전국학련구국대는 제각각이었다. 계급이나 군번이 없는 것은 물론 군복, 교복 등 옷차림도 다양했다. 단지 비둘기 마크에 ‘학병’이라 쓴 견장과 모표가 전부였다. 하지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마음만은 하나였다. 또 그는 조병옥, 김병로, 김도연 선생 등과 함께 구국총연맹을 결성했다. 국가의 위기를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지원병을 모집하고, 민심을 수습했다. 학도경찰대를 만들어 치안을 정비하기도 했다. 지난날 나라를 위해 반탁반공운동으로 똘똘 뭉쳤던 것처럼 또 다시 누란에 처한 조국을 우리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각오에서였다.
북한군은 빠르게 전세를 구축해갔다. 학도병들은 가슴에 태극기 하나씩을 두르고 각 전지에 나섰다. 북한군은 최종 목표인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전차를 선두로 낙동강 전선까지 다달았다. 여기에는 충남 학도병 300여 명이 육군 25연대에 편입하여 1주일간의 집총훈련을 받고 3사단에 배속되었다. 또 학도병은 민간 유격대로도 활약했다. 당시 대구 동촌비행장 인근은 미군 보급 물자의 집산지였는데 주변에 피난민촌이 형성되어 피난민으로 위장한 간첩이 많았다. 날로 좁혀져 오고 있는 전선을 두고 민심이 동요하고 있었다. 정보국에 투입된 학도병들은 특무대에 파견되어 떡장수, 오징어장수로 변장하여 북한군을 색출하며 후방치안에 힘썼다.
8월에 이르자 북한군은 15일 광복기념일까지 남조선군을 해방시킨다며 더욱 압박을 가했다. 북한군 제12사단은 1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타고 남하하여 기계와 안강 부근에 출현하고 있었다. 그 시각 국군은 10,000여 명의 병력으로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공격을 저지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을 빼앗기면 아군의 보급로가 차단될 것이 뻔했다. 북한군도 이곳을 통해 부산으로 진출하기 위해 애썼다. 피아 모두 사활을 건 전투였다.
그렇게 무더운 여름이 지나갔다. 두 달간의 치열했던 기계-안강 전투에서 학도병 60~70%가 전사했다. 당시 국군 10개 사단과 그 예하 부대는 이처럼 학도병이 참전하지 않은 부대가 없었다. 안강, 기계, 다부동, 안동, 여천, 포항, 창녕, 함안, 마산 등 최후의 교두보에서 계급도 군번도 없이 싸우고 피를 흘렸다. 청년 이철승도 마찬가지였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조국이자 우리의 미래를 위한 싸움이었다. 전국학련 학도의용군이 든든하게 함께 했기에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고, 이 지역을 지켰기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
현재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 안에는 반탁반공건국운동과정과 6·25전쟁에서 순국한 전국학련 동지들을 추모하기 위한 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이 1989년 8월 15일 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에 의해 건립되어 있다. 그는 서울 수복일인 9월 28일이면 매년 이곳을 찾아 뜨거웠던 그날에 산화된 청춘의 피와 땀,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곤 한다.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사업이겠지만 전국학련의장이었던 이철승 의장이 지속해오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선포되었다. 기나긴 전투가 끝나고 그는 동시에 서울에 상경하여 정계에 진출한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조국을 정비하기로 했다. 대한민국과 시작을 함께 했으니 이번에는 이제 사랑하는 조국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했다. 그는 3대 국회에 입문한 이후 7선 국회의원과 신민당 총재 등을 지내며 국회부의장과 헌정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올해 5월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에 재선출됐다.
“평창올림픽 보고 평양 가서 냉면 먹으려면 건강해야죠”
이철승 의장은 어떠한 포상이나 반대급부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애국심이야 말로 그를 지탱한 힘이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스러져간 젊음의 불빛, 그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영광을 함께 하고 있자니 시간은 훌쩍 흘러 93세가 되었다. 비록 참전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 6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도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청년이다.
“평창올림픽 보고 평양 가서 냉면 한 그릇 먹고 오려면 건강해야죠.”라고 말하며 동지들에게 건강을 당부하는 그는 이평논자(二平論者, 평창의 평, 평양의 평을 강조하는 말)임을 자처하면서 아직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선수현 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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