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리의 스케치北 | 남강 여인, 억센 손에 장총 부여잡고 전진 2012년 6월호
박계리의 스케치北
남강 여인, 억센 손에 장총 부여잡고 전진
<남강마을의 여성들>은 화가 김의관이 1966년 제작한 조선화다. 총과 볏짚을 진 여성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좌우를 살피며, 소를 몰고 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이다. 화면은 중심에 총을 쥔 여성에 감상자의 시선이 집중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만지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입체감이 잘 표현된 총. 시선은 이 총을 쥔 여성에서 다시 소로, 다시 옆에 볏짚을 쥔 여성을 통해 오른쪽으로 흘러 나가도록 구성되어 있다.
화면 왼쪽 끝에 흐릿하게 보이는 인물과 화면 중앙에 선명하게 강조된 인물의 배치는 화면 안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을 것은 깊이감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선원근법, 공기원근법을 사용하여 착시현상을 통해 사진기로 찍은 것 같은 사실적인 회화를 만들어 내고자 한 것이다.
손에 잡힐 듯한 입체감 … 새로운 조선화의 탄생
물론 화면 안으론 걸어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테크닉을 ‘일루전’, 즉 착시현상을 토대로 한 환영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화면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깊이감과 만지면 잡힐 수 있을 것 같은 입체감을 표현한 새로운 조선화가 탄생하였다. 이러한 양식이 북한 미술계를 대표하는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는 어떠한 토론과 논쟁이 존재하였을까?
해방 직후 북한 미술계는 1단계 반사대주의이론 투쟁 단계와 2단계 반복고주의이론 투쟁 단계를 거쳐서 김일성주의 미술론을 성립해냈다. 이 작품이 제작될 즈음은 반사대주의이론 투쟁 단계를 통해 전통회화에서 주체를 확립해야 할 당위와 근거만 확보한 상태였으나, 아직 다양한 전통회화 양식 중 어디에 정통성을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채색화 위주의 제한적이고 협애한 조선화의 전형이 확립되지 않은 단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반복고주의이론 투쟁 단계에서는 전통회화의 많은 양식 중 어떠한 양식에 정통성을 부여하여 현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수묵화와 채색화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김용준계인 한상진·리능종의 수묵화 전통계승론과, 조준오·김무삼의 채색화 전통계승론 간의 논쟁에서 조준오·김무삼이 승리함으로써 전통시대 수묵화는 봉건적 잔재로 정의하여 척결해야할 대상으로, 채색화는 계승해야할 대상으로 규정되었다. 형태뿐만 아니라 색채에서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담보하기 위해 채색의 강조와 더불어 전통회화를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분법으로 규정하여 문인화는 봉건 착취계급의 미술형식, 민화는 민중들의 미술형식이라는 도식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하여 현대화된 조선화는 인물 중심의 구상화를 위주로 하여 이를 수묵담채가 아닌 채색화 위주로, 사진기로 찍은 것 같은 사실감을 주기 위한 명암법을 사용하여 입체감을 강조하는 양식이 탄생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이론 투쟁이 정리되자 1965년 김일성이 담화를 통해 채색화를 중심으로 조선화를 발전시킬 것을 선포한다.
가로로 긴 화면, 긴장감·긴박감 극대화
김의관의 <남강마을의 여성들>은 1965년 김일성 담화 직후인 1966년 제작된 작품으로 실제 김일성이 매우 만족해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6·25전쟁 중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남자들 못지않게 후방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여성들의 모습을 주제로 삼음으로써 인민들에게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하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 없이 총을 부여잡고 앞을 주시하는 빛나는 눈동자, 굳게 다문 입에는 추호의 두려움도 없어 보인다. 단련된 억센 손에 쥐여진 장총은 여인네의 용감성을 더욱 부각시켜내고 있으며, 목을 길게 빼든 소의 긴장된 행태를 통해 긴박감을 화면 전체로 확장시키고 있다. 특히 화면의 윗부분을 잘라 가로로 긴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이러한 긴장감과 긴박감을 극대화 시켜내고 있는 역작이다.
김의관은 1939년 평안북도 곽산군 안의리에서 출생하여 1962년 북한 최고의 미술대학인 평양미술대학교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졸업 후 창작의 실마리를 찾아 헤매던 중 어느 날 강원도 고성군의 한 여성을 만나 6·25전쟁 때 남강마을 여성들이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에 참여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남강마을 여성들이 치마폭에 낫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적군이 있는 곳에 들어가 벼를 베어 밥을 지어 전쟁터의 병사들에게 날라다 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김의관은 벼를 베어서 강물을 건너오는 여성들의 모습을 통하여 전쟁 때 발휘한 여성의 슬기롭고 강한 모습을 표현해보기로 하였다고 한다.
화면 중심에서 총을 쥔 여성은 강한 채색의 사용과 더불어 조각상처럼 또렷하게 형상화되어 있지만, 그 옆의 여성과 볏짚은 담백한 채색을 사용하여 평면적으로 형상화해내고 있는 구성도 매우 흥미롭다. 담백하게 채색을 우려내면서도 선의 맛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유화작품에서는 이룩하기 힘든 담백하면서도 경쾌한 화면을 형상화해냄으로써 조선화의 전통을 보다 효과적으로 계승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 시대 북한 미술계는 특정 전통을 정통화하고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 미술사적 문제점이 노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통을 계승하고 현대화하는 실험을 시도하였고 나름의 결과물을 도출해내었다. 그들이 이러한 실험을 통해 선택한 전통과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낸 결과물인 <남강마을의 여인들>이 예술이라는 조형언어를 갖고서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현대의 우리에게도 예술적 감동을 줄 수 있을까? 판단은 이제 우리 감상자의 몫으로 남았다.
박계리/ 이화여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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