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한국 新성장엔진, 시베리아를 가다 | 고려인, 누구인가? 2012년 8월호
통일한국 新성장엔진, 시베리아를 가다
고려인, 누구인가?
땅 속 수백 미터가 얼어 있는 동토대, 영하 20~30℃의 인간이 살기 어려운 혹한, 끊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도 한민족의 민족정기는 극동 시베리아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고대 한민족의 터전이기도 했지만, 타국의 영토로 귀속된 이후 계속 잊혀지고 상실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곳에는 한민족의 후예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 그들은 고려인들이다.
혹독한 시베리아의 개척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했다면, 단연코 한민족의 희생은 빼놓을 수 없다. 19세기 중엽 조선 북부 지역에 흉년이 엄습하자, 한민족은 생존과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쪽으로 이동했다. 당시 이 지역은 조선과 중국 어느 나라의 통치권도 미치지 않은 무주지(無主地), 이른바 간광(間曠)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한민족의 진출로 조선 북부 지방의 연장으로서 한민족의 생활터전으로 편입된 지역이 바로 그 유명한 간도(현재 연변지역)다. 그리고 간도의 동쪽 지방, 즉 동간도가 오늘날 말하는 러시아 극동 지역을 포함한다. 간도는 동간도와 서간도로 나눌 수 있는데, 동간도는 다시 백두산과 송화강 상류 지방인 ‘동간도 서부’, 두만강 건너 지방인 ‘동간도 동부’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동간도 동부 지역을 일명 ‘북간도’라고도 한다. 이 지역의 일부는 1860년 북경조약 이후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 되어, 러시아 극동 연해주 지역으로 불린다.
최초 고려인, 1864년 대흉년 피해 동간도로 이주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힘이 없는 약소국가로서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역사적 불행으로서 한민족은 중국과의 북방경계(국경선) 설정 문제에서나 러시아와의 북방경계 설정 과정에서 당사자로서 배제되었다.
1881년 만주가 개방됨에 따라 청국은 간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정부에 조선인들의 쇄환을 요구했고, 조선정부는 1712년 건립된 백두산정계비(서위압록 동위토문 : 조선과 청의 국경은 압록강과 토문강)를 근거로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청국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1909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9년 9월 이른바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간도를 청국에 넘겨주었다. 타당한 많은 논리에 의해 간도협약이 무효라면, 간도는 당연히 우리의 땅이 되는 것이다.
러시아와의 국경선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중국과 러시아 간에 결정되었다. 1860년 북경조약 제1, 2조(국경획정조항)에서 러시아는 흑룡강 이북과 우수리강 이동 지역(연해주)을 차지함으로써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중국과 러시아 간의 북경조약 체결조차 모르고 있었고, 당연히 이 조약의 1조에서 파생한 조·러국경선의 형성을 알 리가 없었다. 이 사실이 조선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61년 중국과 러시아의 관리가 두만강 연안의 동부국경 최남단 국경표지인 토자비를 세울 때였다.
1864년(고종1년) 대흉년으로 두만강을 건너 소위 동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개척자들이 바로 고려인들이다. 중국의 한민족 동포가 ‘조선족’으로 불려진 반면, 그들이 ‘고려인’이라 불린 이유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 러시아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러시아어로 당시 조선은 ‘꼬레야’이고 조선인은 ‘까레이스키’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 스스로도 자신을 ‘꼬레 사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오늘날 고려인이 된 것이다.
1874년 25명이 이주하여 초가집 다섯 채로 시작된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척촌(개척리)은 l년도 채 못 되어 신한촌(新韓村)으로 발전했다. 지난 호에서 소개했듯이 ‘신한촌’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초기 조선 농민들의 극동 시베리아 진출은 농업개척과 관련이 있었지만,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점당하자 ‘신한촌’을 중심으로한 지역은 해외 민족독립운동의 중심지, 항일민족지사들의 집결지로 변해갔다.
한편 일제는 신한촌 외곽 약 1km 지점에 일본영사관을 두고 신한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항일민족운동의 동태를 감시했다. 게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시아가 전시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신한촌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던 항일민족운동도 러시아 당국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1920년 신한촌 참변과 우수리스크 참변 등 일제에 의한 고려인 대량학살 사건들이 벌어졌다.
1937년 또 다시 극동 시베리아는 우리민족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일본과 소비에트의 제국주의적 적대관계와 -소련은 고려인들이 일본의 스파이 노릇을 할지 모른다고 염려했다.- 스탈린의 민족강제이주정책으로 신한촌이 폐쇄되고, 약 20만명의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그러나 이주 과정에서 수천 명의 인명과 막대한 재산 손실에도 불구하고, 낯설고 척박한 중앙아시아의 광야에서도 고려인들은 개척하고 개간하며, 한민족의 기상을 드높였다. 그리고1993년에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 최고회의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고려인의 명예회복을 결의했다.
20만명 고려인, 현재도 남·북과 한·러 가교역할
현재 러시아에 거주하는 약 20만명의 고려인들은 또 다른 도전과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소련이 붕괴되고, 강제이주의 명예가 회복되자 많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를 탈출하여 그들의 조상의 땅인 시베리아 극동 연주해로 돌아왔고 또 돌아오고 있다. 역사적 개척자로서, 항일독립투사로서 고려인들의 사명은 오늘날 러시아와 한국을 연결하고 남과 북을 연결하는 가교로서의 역할로 계승되고 있다.
일본인들은 한탄한다. 소련이 붕괴되고 자본력과 기술이 앞선 일본이 대러시아 투자에서 한국인들에게 뒤진 이유가 바로 한국인들에게는 고려인이라는 매개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립투사로서 그들의 진출을 촉진한 일본이 이제는 그 고려인들의 역습을 받은 것이다. 한민족의 기상과 정신은 역사적 터전이었던 북방 지역을 중심으로 여전히 피와 땀을 쏟으면서 번성하고 있다.
배규성 / 배재대 한국-시베리아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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