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3기 푸틴 정부 ‘유라시아 연합’ 추진 주목해야 2012년 8월호
<편집자주>
올해 3월 초 러시아 대선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이 당선되고 5개월이 지났다. 지난 2000년과 2004년에 이어 세 번째로 대통령직에 오른 푸틴은 그간 공공연히 ‘강한 러시아 재건’을 천명해왔고 그 핵심전략에 아시아 중시 외교가 있다. 러시아의 부활은 급격하게 부상하는 중국, 전략적으로 아시아에 복귀하고 있는 미국과 함께 한반도의 세력판도를 가늠할 주요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향후 6년은 물론 12년간의 통치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막강한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푸틴. 푸틴의 러시아가 펼쳐나갈 대내외 정책을 전망해보고 향후 한반도에 미칠 영향과 함께 우리의 대응방향을 모색해 봤다.
특집 | 러시아의 부활과 한반도
<대내> 3기 푸틴 정부 ‘유라시아 연합’ 추진 주목해야
2012년 5월 7일 모스크바의 크렘린 대궁전에서 대통령 취임식이 진행되었다. 2000년부터 대통령으로서 8년, 이후 메드베데프 정부의 ‘실세 총리’로서 4년, 도합 12년에 걸쳐 러시아의 최고권력자 지위를 유지했던 블라디미르 푸틴이 또 다시 6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복귀하는 순간이었다.
현대판 ‘차르(Czar)’의 싱거운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 달리 지난 3월 대선은 집권세력의 사활이 걸린 치열한 선거전이었다. 비록 푸틴이 60%가 넘는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복귀할 수 있었지만, 푸틴 정부는 과거와 달라진 정치지형에서 상당한 부담과 과제를 안고 출발하게 되었다.
험난했던 재집권 과정은 러시아가 이른바 ‘성공으로부터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12년간 러시아는 높은 수준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의미 있는 현상 중 하나는 중산층의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1998년 전국민의 5~10% 밖에 되지 않던 중산층은 이제 20~30%에 달하고 있고, 이들은 러시아의 정치지형을 변화시키고 있다.
2000년대 푸틴 정부는 1990년대 옐친 정부 시절의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조치들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이러한 조치들이 민주주의 체제의 규범적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정부는 실적과 업적을 통한 도구적 정당성 확보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중산층 확대 … 정치지형 변화시켜
그러나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의 결과로 형성된 중산층은 점점 규범적 정당성을 훼손하는 집권세력의 권력 집중화, 연방체제의 수직화, 패권정당체제, 관리자본주의, 언론 통제 등 권위주의적 조치에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2011년 9월 푸틴과 메드베데프의 사전 합의에 따라 푸틴이 다시 대선 후보로 추대되고, 12월 총선의 대규모 부정이 드러나면서, 중산층은 반감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집권세력의 오만은 권력의 사유화와 부정선거를 낳았고, 이러한 규범적 정당성의 훼손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변화된 정치지형에도 불구하고 푸틴이 재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재 러시아 정치가 직면하고 있는 ‘대안부재의 딜레마’ 때문이다. 공산주의자에서 극우민족주의자, 그리고 자유주의자까지 각양각색의 다양한 이념적 정향을 가진 ‘반 푸틴’ 진영 정치엘리트들은 단합된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다수 국민들에게 푸틴의 리더십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반면 푸틴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위기로 기억되는 1990년대로의 회귀, 그리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으로 상징되는 지난 12년을 대비시키면서 국민들에게 선택을 요구했다.
또한 막연하게 보이는 ‘푸틴 반대’ 구호에 맞서 ‘안정 속의 변화’를 약속하고 개혁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푸틴의 재집권은 ‘대안부재의 딜레마’가 오늘날 러시아 정치에서 얼마나 핵심적인 문제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3기 푸틴 정부는 어떠한 대내정책 과제를 설정하고 있는가? 푸틴은 선거운동 기간 주요 일간지를 통해 수차례 자신의 정책 프로그램을 기고문 형태로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먼저 푸틴은 정치적 참여 확대와 분권화에 대한 중산층의 요구를 수용하는 ‘민주주의 메커니즘 혁신’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정치 및 정당 시스템 발전, 새로운 참여 메커니즘 도입, 지방자치 활동 제고, 연방체제 분권화, 국가경쟁력 제고, 부패 추방, 사법 시스템 발전 등을 정치개혁의 과제로 제시했다.
이는 규범적 정당성의 부분적인 회복을 위해 중산층에게 다양한 정치적 참여의 통로를 마련하면서, 기초단위 강화에 기초한 연방체제의 분권화를 추진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푸틴의 이러한 정치개혁안이 러시아에서 실질적 민주주의의 강화에 기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늘날 러시아 민주주의의 근본문제는 참여와 경쟁을 제한하는 제도뿐만 아니라 비제도적 권력에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난 4년간 푸틴이 총리로 재임하면서도 대통령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처럼, 현재 러시아에는 제정된 규칙을 우회하는 통제방식이 활성화되어 있다. ‘반 푸틴’ 진영과 야당들이 구체적이고 세밀한 정치개혁 프로그램을 내놓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음으로 푸틴은 글로벌 경제위기와 WTO 가입이라는 변화된 환경을 고려하여 중산층과 민간기업의 경제개혁 참여를 러시아 경제의 새로운 발전 동력으로 규정했다.
또한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는 원료·에너지 부문 외에, 경제구조 다각화와 R&D 투자를 통해 세계적 수준의 기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를 발전시킬 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은 경제개혁에 필요한 투자의 확보를 어렵게 만들고 있고, 국가주도 경제와 산업정책의 효과는 점점 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중산층과 민간기업 참여와 경쟁 강조
따라서 부분적인 민영화와 국가의 역할 축소, 러시아 국민들의 투자 유인 프로그램 마련, 비즈니스 환경 개선 등을 통해 중산층과 민간기업의 참여와 경쟁을 유도하여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은 현 시점에서 불가피한 조치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안의 현실화는 근본적으로 경제의 구조적 혁신에 필요한 예산 확보와 경쟁력 제고를 담보할 수 있는 민영화 정책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다고 판단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푸틴이 내수시장 확대를 위한 방안 중 하나로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메커니즘들의 잠재력 활용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2011년 10월 저명 일간지 <이즈베스티야>에 게재된 기고문에서 푸틴이 제창한 ‘유라시아 연합’의 창설과 발전은 향후 러시아의 대외경제정책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푸틴은 이 기고문에서 러시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관세동맹과 단일경제공간을 기반으로 한 더 긴밀한 경제통합체이자, 유럽과 아·태지역을 연결하는 초국적 조직의 모델로서 ‘유라시아 연합’을 제안한 바 있다.
변화된 정치지형에서 3기 푸틴 정부는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제 중산층의 민주주의와 정치개혁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담보하는 경제개혁이 실현될 수 있을지 여부만이 아마도 이 ‘새롭고도 오래된’ 푸틴 정부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제성훈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러시아-CIS팀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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