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한국 新성장엔진, 시베리아를 가다 | 러시아 극동 항일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아서 2012년 9월호
통일한국 新성장엔진, 시베리아를 가다
러시아 극동 항일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아서

일제강점기 당시 러시아에서 항일 독립투쟁을 벌인 백추 김규면(1880~1969) 선생(왼쪽 첫줄)과 동료들(뒷줄 좌측이 독립투사 임표). 김 선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사회당 결성에 참여했고 연해주 해방전투 때 한인 연합부대 군사위원으로 참전해 일본과 결탁한 러시아 백군을 몰아냈다. 김 선생은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총장대리에 선임되기도 했으며 200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연합뉴스>가 지난 2009년 8월 13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국립 아르세니예프박물관 수장공에서 발굴한 항일 독립투사 사진이다. ⓒ연합뉴스
만주와 극동 시베리아 지역을 포함한 동간도 지방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심정적으로 우리 민족과 분리될 수 없는 터전이 되었던 것은 이곳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적 터전이자 한민족의 활동무대였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이곳이 바로 한민족 스스로의 운명을 독자적으로 결정짓고자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투쟁한 항일 독립투사들의 피와 혼이 어려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러시아 극동지방의 의미를 재강조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이면서 상대적으로 잊혀졌던 민족사의 일부분을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노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미흡하며, 러시아 극동지방을 한민족의 활동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한국 현대사의 범주를 완성시키는 노력의 일환이 될 것이다.
극동지역 항일운동사, 조명받지 못한 이유?
일제시대 러시아 극동지방,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조명은 역사적 중요성과 타당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성과가 나타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동북아 지역 국가들의 현실적 이해관계, 특히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국가들의 역사적 관점과 이에 따른 대응방식이 종종 역사인식의 장애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만주 항일 무장투쟁에 대한 논의는 남북 간의 역사관과 역사인식에 대한 대립적 시각은 물론 중국의 팽창적 역사관과도 연결되어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만주 항일 무장투쟁에 대한 연구는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대한 역사적 정통성을 제공하려는 시도로 북한에 의해 의도적으로 확대, 과장된 측면이 적지 않았다.
중국 또한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무장투쟁을 중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다. 중국의 입장은 중국공산당이 주도적인 집단으로 편성된 항일운동의 경우, 공동의 적인 일제와 싸우는 과정에서 특별히 민족을 분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점 이외에 소수민족이었던 조선인들이 독자적인 조직형태가 아니라 개인적 수준에서 참가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중국공산당의 항일 무장부대 내 일부든, 독자적인 소수의 무장부대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민족의 활동이고 한민족의 역사인 것이다.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던 조선인 부대가 소련의 연해주 지역으로 건너가 소련군의 지휘를 받은 것도 마찬가지다. 항일연군의 월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항일연군이 소련으로 패퇴한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로서 소·만 국경을 넘나들면서 소부대 게릴라 활동을 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평가받고 있고 또 받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미 극동 연해주 지역에는 항일운동의 민족적 정신은 물론 이주한 한인들의 생활터전과 문화적 전통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7년에 블라디보스토크 역내 거주 한인은 4만명이 넘었고,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에 거주하는 한인은 5만5천명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소비에트 정권의 수립과정에서도 연해주의 한인들은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이미 이동휘, 안창호, 고상준, 신채호 등이 주도한 항일 군사조직들이 활동했다.
1918년 4월 4일 밤 블라디보스토크에 일본군이 상륙하고, 1922년 10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가 탈환될 때까지 한인 빨치산 대원들은 적군 및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 참여했다. 러시아의 내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모스크바 등과 연계하여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스탈린, 반일성향 한인 탄압 … 중앙亞 강제이주
그러나 시베리아와 극동 연해주에서의 한인의 역사는 항상 시련으로 도전받았다. 1925년 1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채결된 소·일 간 협정으로 소련정부는 소련 내에서 반식민 항일운동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보장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식민정책을 반대하는 어떠한 군사적 협정도 체결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그 후 1931년에서 1935년 사이 일제는 6천명 이상의 공산주의자 및 민주주의자를 포함한 한인애국혁명주의자들을 투옥시켰다.
소련정부는 193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해방운동을 지원하는 노선에서 점차 이탈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부터 민족 해방운동에 참여한 한인들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시작되었다. 1938년 중반까지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 및 행정부의 고위직에 단 한 사람의 한인도 남아있지 못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첩보원이나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혀 사라졌다.
스탈린체제 하에서 수천에 달하는 반일성향의 한인들이 탄압을 받았고, 그 후 모든 한인들이 극동지방에서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던 것이다.
1993년에 러시아 최고회의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고려인의 명예회복을 결의했지만, 중앙아시아와 극동 지역에 흘린 한민족의 피는 역사의 일부로서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러시아 극동지방은 당연히 한민족의 역사적 터전이 된다.
<통일한국 新성장엔진, 시베리아를 가다!> 5월호 “유럽계의 시베리아 유입과 ‘러시아화’” 및 6월호 “유라시아 복합문화 산실 한민족 뿌리 닿아 있어”의 내용은 학술진흥재단 연구사업 제안(배재대 러시아학과 이길주 교수)을 참고 및 인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배규성 / 배재대 한국-시베리아센터 책임연구원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