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초점 | 블라디보스토크 APEC 정상회의와 푸틴의 일석사조 전략 2012년 9월호
시사초점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루스키섬에서 바라본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러시아 정부는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극동지역을 적극 개발하기 위해 공항·도로·항만·호텔 등 인프라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연합뉴스
블라디보스토크 APEC 정상회의와 푸틴의 일석사조 전략
APEC 정상회의가 9월 8~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다. 근대 이후 수백 년간 유럽 편입을 시도했으나 아직 유럽국가로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가 소련 붕괴 이후 아시아 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1998년 APEC에 가입하고 이제 그 정상회의까지 주최하게 된 것이다.
중국 등 동북아 및 아태지역 협력은 당위
고르바초프를 제외한 역대 소련 지도자들에게 시베리아·극동은 에너지·천연자원 및 군사전략상의 관심거리에 불과했으나 소련 붕괴 후 상황이 바뀌었다. 냉전 종식으로 군사안보보다 체제전환의 혼돈 속에 추락하는 경제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해졌으므로 러시아의 비교 우위인 풍부한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절실해졌다. 그러나 시베리아·극동의 에너지·자원은 부패한 지방 호족들에 의해 서구 자본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2000년 집권한 푸틴 대통령은 에너지·자원에 대한 국가 지배력을 회복하며, 중앙권력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는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연방관구를 만들고 대통령 전권대표를 파견하였다. 특히 저개발상태여서 주민의 불만이 크고 인구 유출이 심한데다 지방 호족의 전횡이 심해 원심력이 강한 시베리아·극동의 이탈을 막고 국가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에너지·자원을 개발하여 국가 수익도 증진할 뿐 아니라 지역 발전을 도모하였다.
더구나 21세기 세계경제의 주역으로 등장한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 및 아태지역과의 협력은 당위였다. 시베리아·극동에 적극 투자할 수 있는 국가가 신흥 경제강국이자 인접국인 한국·중국·일본일 뿐 아니라 미국은 금융위기로 그리고 유럽은 재정위기와 불황으로 투자할 여력이 많지 않으므로 동북아 국가들과의 협력은 더 필요했다.
특히 미국이 탈냉전시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나토를 동진하고 유럽MD를 추진할 뿐 아니라 러시아 국내 문제에까지 개입하므로, 푸틴은 미국의 ‘일방적인’ 세계 주도를 견제하기 위해 동병상련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중국과 협력적 동반자 관계를 강화할 필요도 있다. 중국의 투자를 유치하여 산업을 진흥하고 중국이 필요한 첨단무기와 에너지를 공급함으로써 러·중 협력을 도모하는 한편 경제 수익을 얻고 낙후지역도 발전시키려했다.
끝으로 시베리아·극동을 에너지·물류 중심지로 전환해 아태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강대국 위상을 회복한다는 일석사조적인 전략 차원에서 아태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APEC 정상회의까지 개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APEC 내에서 러시아의 위상은 크지 않다.
먼저 러시아 엘리트들이 유럽국가를 지향했듯이 APEC 국가들도 러시아를 아태국가로 간주하지 않는다. 러시아는 1989년에 창설된 APEC에 1998년에야 가입하였다. APEC은 순수하게 경제협력 진흥을 위해 설립되었는데, 러시아의 무역에서 아태국가들이 20%를 차지하지만 APEC 국가들의 무역에서 러시아는 1%만 차지할 정도로 러시아의 존재감이 낮은 것도 문제다.
러시아는 구소련국가들인 벨라루시 및 카자흐스탄과는 공동경제영역을 형성하였지만, 유럽이나 아태국가들과의 FTA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010년에야 EFTA(유럽자유무역연합)와의 FTA 협상에 관심을 보였고 2011년에 뉴질랜드와 협상을 시작했을 뿐이다.
즉 러시아는 아태국가들의 경제협력망에서 배제되어 있다. 더구나 푸틴의 유라시아주의에 입각한 극동 및 아태지역 중시 정책은 유럽 중시 세계관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러시아 엘리트의 반발과 미국의 견제에 부딪혔다.
‘코리아 프로젝트’ 탄력 받을 가능성 커
먼저 러시아는 2007년 중·장기 극동지역개발계획을 수립·추진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푸틴 총리는 2010년 극동·바이칼지역개발기금을 창설하였고 2011년 11월에는 시베리아·극동을 개발하는 ‘자치국영공사’ 설립을 추진했으나 재무장관이나 부총리 등 고위 관료들의 집단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2012년 5월 재집권한 푸틴은 시베리아·극동 발전을 전담하는 극동개발부를 신설하고 재무부에 비견되는 막강한 권한을 주었으며, 하바로프스크 주지사를 네 번이나 역임하고 극동연방관구 대통령 전권대표를 맡고 있는 빅토르 이사예프를 장관으로 겸임·임명했다.
또한 러시아의 동북아전문가들은 러시아가 남·북·러 가스관 건설이나 시베리아횡단철도와 남북한종단철도 연결사업 등 ‘코리아 프로젝트’를 추진하려할 때마다 미국이 실질적으로 방해했다고 주장한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 5월 미국 G8 정상회담에 메드베데프 총리를 보냈지만 이번 APEC 정상회담에 오바마 대통령 대신 클린턴 국무장관이 참석하는 것도 러시아의 아태진출에 대한 미국의 견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이번 APEC 정상회의를 통해 러시아가 유럽국가이자 아시아국가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에너지·천연자원 개발 및 물류산업을 중심으로 아태국가들의 투자를 유치, 시베리아·극동을 개발해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며 극동의 안보를 강화하면서 아태지역에서 러시아의 강대국 위상을 회복하려 한다.
러시아는 회의의 주요 의제로 무역·투자의 자유화, 지역경제 통합 진전, 신뢰할 수 있는 교통과 물류망 구축, 식량안보 개선, 혁신적 성장 진흥, 석유·가스와 전기·원자력을 포함한 에너지 확보, 자연재해·전염병 등 비상사태 관리를 위한 회원국 간 협력 발전 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국가전략과 관련하여 러시아는 철도 연결과 남·북·러 가스관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하고 북한도 이에 원칙적으로 합의하였으며, 지난 6월초 북·러 경협에 최대 장애로 간주되던 110억달러에 달하는 북한의 대러 채무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코리아 프로젝트’가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더구나 푸틴 대통령의 정력적인 외교를 감안하면 머지않아 북·러 정상회담이 개최될 수도 있다. 한국정부가 미래지향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로 이러한 변화에 접근한다면 경제적 실리와 에너지안보, 한반도 물류기지화 및 북한문제 해결 등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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