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창작동화| 할머니의 메밀밭과 두루미 2012년 9월호
통일창작동화
할머니의 메밀밭과 두루미
어느날 할머니에게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생겼습니다. 국가에서 이산가족 면회를 위한 신청조사를 받게 되셨습니다.
할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면회 신청하셨지만, 할머니를 찾는 북쪽의 가족들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가족분들이 모두 돌아가셨거나, 할머니를 잊어버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는 크게 낙담하셔서 몸져 누우셨습니다. 할머니의 메밀밭도 올해는 가꾸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세상에 자신을 기억해주는 형제들이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시고 너무나 외로워서 병이 드셨나 봅니다.
할머니의 병은 점점 깊어지고 가을이 되어도 할머니는 거동할 기력도 없이 누워만 계셨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의욕을 되찾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할머니 고향마을에 대한 사진 자료들을 수집했습니다. 할머니가 뛰어놀았을 산과 마을은 지금은 황폐한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들 속에서 신기한 광경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이것 좀 보세요. 여기 할머니 고향 맞죠?”
할머니는 고향 얘기에 돋보기를 쓰시고 사진을 들여다 보셨습니다.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왜 그러는데?”
“여기 이 산이요, 이 산 좀 보세요. 이게 작년에 찍은 사진이고, 이 사진은 올해 찍은 사진이거든요. 근데 여기 보세요. 작년에는 없던 메밀밭이 보여요. 밭이라기엔 좀 엉성하지만 이거 메밀꽃들 아니에요?”
사진들 속에는 산등성이에 듬성듬성 흩어져 피어있는 하얀 메밀꽃들이 보였습니다.
“이거 혹시 할머니가 날려 보낸 메밀씨앗들이 자라난 것 아닐까요?”
“글쎄다, 그 메밀종자들이 정말 우리 고향에 도착했을까?”
“그럼요. 할머니 아니면 누가 이런 인적 없는 곳에 메밀을 이렇게 심었겠어요. 할머니의 풍선들이 고향에 간 게 틀림없을 거예요.”
“그래 정말 그랬으면 좋겠구나. 내 정신 좀 봐! 그럼 우리 두루미들은 어떻게 됐을까? 세미야, 어서 채비 좀 챙겨라. 나랑 같이 메밀밭에 가보자꾸나.”
할머니는 너무 오랜만에 기운을 차리시고 임진강변의 메밀밭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전의 메밀밭 자리는 억새와 잡초만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이맘때면 날아와 있어야 할 두루미 가족들도, 물새들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 탓이야! 내가 게을러서 이 애들을 제대로 보살필 생각을 못했어. 말 못하는 짐승들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할머니는 탄식하며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강변의 여울과 주변의 풀숲을 뒤져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슴푸레하게 해가 저물어 올 즈음에 북쪽 하늘에서 커다란 날개짓을 하며 두루미 떼들이 날아 왔습니다. 그리고 억새와 잡초로 무성한 할머니의 메밀밭 중간에 내려앉았습니다. 두루미들은 먹을 것이 없어졌어도 할머니의 메밀밭을 기억하고 다시 찾아왔습니다.
할머니와 저는 너무나 반갑고 기뻐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비록 할머니의 가족을 찾지는 못했지만 할머니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또 하나의 가족들이 잊지 않고 할머니를 찾아와 준 것입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부쩍 기운을 차리시고 강변으로 나가 두루미의 음식을 살피며 정성껏 두루미 가족들과 물새들을 돌보았습니다. 두루미 가족과 할머니의 이야기는 곧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메밀밭을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무도 밭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멀리서 두루미들과 할머니의 교감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할머니에게 두루미 할머니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두루미 가족들은 또 한 겨울을 나고 새 봄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두루미들과의 이별을 준비하시던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올해는 메밀 씨앗 풍선 안 띄우세요?”
할머니가 방긋 웃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세미야, 이제 할머니는 풍선을 띄우지 않을꺼야. 왜냐하면 할머니는 이미 그곳에서 온 답장을 받았거든!”
“네에? 답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하얀 풍선 조각을 꺼내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작년에 내가 띄워 보낸 풍선들 중의 한 조각일거야. 그런데 이 조각이 저 두루미의 발에 걸려 돌아왔단다. 아마 나를 대신해 고향에 가서 메밀들이 잘 피어 있는 것을 확인해 준 것 같아.”
“진짜요? 너무 신기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할머니는 날아가는 두루미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했어. 언젠가 그곳에 직접 가서 다시 메밀을 심고 친척들을 만날 거거든.
저 새들처럼 자유롭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나는 믿기로 했단다.”
나는 붉어지는 노을 속에서 할머니의 눈시울도 발갛게 물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할머니의 등을 뒤에서 안고 임진강 여울 위에 비치는 가을 노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는 올해 봄 갑작스런 노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고향에 돌아갈 희망을 버리시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고향 방문 대기 순번은 5,000번이 조금 넘게 남은채로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메밀밭은 이제 새롭게 가꾸어지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유지를 이어받아 두루미 가족을 위한 생태 공원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루미 할머니가 고향을 그리워했던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해 듣고, 두루미 가족들과 물새들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할머니와 같은 아픔과 역사가 되풀이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할머니는 아마도 두루미가 되셨을 것 같습니다. 자유롭게 북쪽의 하늘을 날아가 고향집 앞에 내려앉아서 과거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셨을 겁니다.
하얀 메밀꽃이 피었다 여물고 서늘한 강바람에 탐스러운 메밀이삭들이 고개를 숙이면 할머니는 힘찬 날개를 펼치고 나를 보러 다시 찾아오실 겁니다.
송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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