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리의 스케치北 | 보천보전투 승리기념탑 1 2012년 10월호
박계리의 스케치北
보천보전투 승리기념탑
기념비미술이란 우리식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조소에 속한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이 장르 앞에 크다는 의미의 대(大)라는 글자를 붙여 흔히 ‘대기념비미술’이라고 호칭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설치미술에 가까운 크기를 지니고 있다. 북한 미술이 선전선동 차원에서 인민들의 교양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항상 관람 가능한 북한식 공공미술의 개념인 기념비미술이 북한 미술 안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높을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총 2회에 걸쳐 북한 미술계에서 대기념비미술의 역사적 시원이 되는 작품이라 평가하고 있는 <보천보전투 승리기념탑>을 감상해보고자 한다. 북한에서는 <보천보전투 승리기념탑>을 북한에서 처음으로 세운 혁명전통 기념비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 김일성이 직접 보천보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탑을 건립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발의된 이 탑은 2중 천리마 조각 창작단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온 우수한 조각가들이 참여하여 제작된 것으로 양강도 혜산시에 건립되었다. 1,300㎡의 붉은 화강석 깃발 아래 60명의 군상이 힘차게 전진하는 모습을 서사적인 장중함으로 구성해낸 이 기념탑은 식민지 시대 김일성의 지휘 밑에서 1937년 진행되었다는 보천보전투의 승리 30년차에 맞춰 1967년 6월 4일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김정일 “건립 반대론자, 반당반혁명분자!”
북한에서는 1966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대표자 회의에서 인민들을 조직사상적으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조직화하는 문제가 중요한 혁명과업으로 제기되었다. 이는 아직도 북한사회가 김일성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조직화되어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김일성의 혁명운동을 기념비적 조각으로 제작하고자 한 <보천보전투 승리기념탑> 건립이 발의되자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먼저 이 탑의 정면에 김일성 형상을 세우는 것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또한 “탑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느니 “유격대원들을 너무 많이 형상화하였다.”느니 하며 내용과 구성을 변경시키고 탑의 규모를 작게 하려는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하여 기념탑 건립을 진두지휘하던 김정일은 1967년 5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이 탑의 건립을 반대하던 이들을 ‘반당반혁명분자’로 규정하고 종파주의자로 낙인, 성공적으로 공격함으로써 김일성 동상을 중심에 배치한 <보천보전투 승리기념탑>을 계획 그대로 건립해낸다. 이로써 반대론자들이 척결되고, 북한이 김일성 중심의 사회임이 국내외에 천명된 것이다. 따라서 <보천보전투 승리기념탑>은 북한 미술의 대표적 장르 중 하나인 기념비미술의 시원이라는 미술사적 의의뿐만 아니라 정치사적인 의의도 함께 지닌 작품이라 하겠다.
이 시기 북한 내부에서는 혁명 전통의 폭을 상하좌우로 넓힌다는 명목 하에 공자와 맹자의 봉건유교사상을 인민들 속에 퍼뜨리는 것,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논리, 조선화의 수묵화를 전통적인 형식으로 이해하고 이를 장려하면서 채색화를 그리지 못하게 하는 행위, 또한 이와는 극단적으로 과거 민족미술유산에서 별로 찾아볼 것이 없다는 편향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들을 ‘종파주의자’로 규정하고 척결하기 위한 투쟁에 박차를 가한다. 이에 따라 미술계에서도 소위 ‘반당반혁명분자’들이 부식해놓은 사상여독을 청산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철학에 대한 문제,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 결국 혁명전통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로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에 김정일은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혁명전통을 미술작품의 주제로 삼는 김일성 형상 작품을 미술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작업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보천보전투 승리기념탑> 건립이 시사하듯 김정일의 이러한 사업들이 성공적으로 추진됨으로써 제9차 국가미술전람회, 1968년 제10차 국가미술전람회에서는 한결같이 김일성을 형상한 혁명적·전투적 미술작품들이 전면적으로 등장하여 전람회를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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