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2년 10월 1일

통일독일 현장을 다녀와서 | ‘리틀 베를린’ 뫼들라로이트의 장벽이 제거되기까지 2012년 10월호

통일독일 현장을 다녀와서

‘리틀 베를린’ 뫼들라로이트의 장벽이 제거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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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서독 접경지대 대부분을 ‘그뤼네스 반트’로 지정해 자연보호지역으로 종합 관리하고 있다.

평화문제연구소와 독일의 한스자이델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통일독일 현장연수를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5일(7박 8일)까지 다녀왔다. 통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연수였다. 연수기간동안 독일의 기관방문 및 세미나, 관련 지역탐방으로 촘촘한 스케줄이었지만 독일 통일의 성과와 시사점을 느끼기에는 충분하였다.

다만 ‘방대한 연수 내용과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어떻게 한국의 통일교육 관련자들에게 전달할 것인가?’ 우리 연수단이 고민한 부분이다. 이 글은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그 역할을 다하고자 작성된 것임을 밝혀둔다.

20세기 독일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간 파시스트 나치 독재역사와 더불어 1949년부터 1989년에 걸친 동독 공산주의 독재역사를 경험했다. 40년 이상의 독재기간 동안 25만명이 넘는 동독주민들이 정치범으로 억압받았다.

1989년 평화혁명에 의해 동유럽의 공산주의정권이 정치적 권력을 잃으며 쇠퇴할 때, 동독의 민주화 운동가들과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지금까지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각 지역의 국가공안국(슈타지, 1950년 설립된 비밀경찰) 본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확보된 슈타지 관련 기록문서는 동독 공산주의 체제의 진상을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슈타지 관련 기록문서의 보존·연구와 관련하여 ‘독일연방 SED독재청산재단’ 등이 결성되어 동독사회주의 독재의 기원과 발생원인, 역사와 그 영향에 대한 재평가 연구를 진행시켜 민주주의 강화와 독일 통일강화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재단의 사무총장인 안나 카민스키 박사와의 간담회를 통해 슈타지에 대한 사법적 처리 등은 한계가 있었지만, 동독사회의 불합리성과 왜곡된 미화로 나타날 수 있는 옛 동독사회에 대한 환상을 불식하고 독일인들의 진정한 통일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역사적·문화적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호엔쉔하우젠 슈타지 감옥의 현장 보존

슈타지는 동독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동독 공산독재를 지탱하는 필수적 공포기관이었다. 이곳에서 조사를 받고 출옥한 동독인들을 통해 동독의 정치체제에 대해 비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물론 동독인들 서로를 감시하는 무서운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작용하였다.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 구조를 연상하게 하는 슈타지는 전국 각 지방에 지부 등의 형태로 구성된 감시체제로 구소련의 지배체제부터 존재하여 동독 공산주의 정권에 그대로 계승되어 동독의 공산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가혹한 감시기관이 되었던 것이다.

보안 유지도 철저하여 통일 직전인 1980년대 말까지 서독의 동독 연구자들에게 이러한 기관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날 정도로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기관이었다고 한다. 통일 이후에도 슈타지에 종사하여 직·간접적으로 고문에 종사한 수많은 중간 관리급들도 입을 다물고 있어 청산작업을 위한 적극적인 증언이 필요하다는 관리인의 호소는 역사 청산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현장이 공개되어 동독 공산주의의 실상을 후대에 전하는 생생한 역사 현장이 되고 있었다.

뫼들라로이트는 마을의 가운데를 장벽이 지나간 분단의 현장이었다. 동·서로 분단됐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해 ‘리틀 베를린’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었다. 1800년대부터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개울을 따라 주 경계선이 나뉘어져 있었지만(독일의 지방분권 등으로) 1949년 독일이 동·서로 분단되면서 당시 주민 50명이 살던 마을에 비극이 시작되어 개울을 따라 1952년부터 1966년까지 동독 측에서 단계적으로 높이 3.4m, 길이 700m의 장벽을 설치를 했다.

매일 얼굴을 마주보던 개울 건너 주민끼리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동독 쪽에서는 서독 쪽으로 손을 흔들거나 인사를 하는 행위조차 금지되어 40여 년간 한 작은 마을에서 크나큰 아픔이 지속되었다.

독일이 통일되면서 새 역사의 전기를 마련하고 분단의 아픈 역사를 알리기 위해 국경 장벽이 설치됐던 장소에 기념물과 박물관을 조성했고 현재 마을은 바이에른주 소속 퇴펜시와 튀링겐주 소속 게펠시로 행정구역이 나뉘어져 있다. 지금은 독일 분단과 통일의 상징이 되어 한국의 분단 현실을 공감하고 통일된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뤼네스 반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과 분단의 상징이다. ‘녹색 띠’라는 뜻의 그뤼네스 반트는 동·서독 국경 ‘철의 장막’ 1,393㎞ 가운데 약 85%에 해당하는 구간에 조성한 생태축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더불어 약 0.1~2㎞로 폭으로 생태공원을 만드는 운동이 펼쳐졌다. 30여 년의 노력 끝에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죽음의 선’을 ‘생명의 선’으로 되살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특히 분단의 역사를 돌아보는 교육이나 관광 목적으로도 두루 활용되고 있다. 독일의 이같은 경험을 생태자원의 보고인 DMZ의 보전과 관리를 오버랩해 볼 수 있었다. 한반도의 경우 동·서를 따라 길이 248㎞, 폭 약 4㎞에 걸쳐 자리 잡고 있는 DMZ는 최근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지정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또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분단의 현장으로 평화와 생명을 상징하는 명소로도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 통일 이후 DMZ도 독일의 경우처럼 자연·문화적 가치를 유지하며 보전·활용할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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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정치대학에서 간담회를 마치고 학생들과 기념촬영

생명의 선으로 되살아난 그뤼네스 반트

독일의 통일은 유럽의 통합을 가져왔듯이 남북한의 통일은 동북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경우, 동독과 서독의 분단 외에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각기 상이한 이권 각축장이기도 했다. 다행히 남북한의 통일은 한반도 주변의 4강대국인 미·중·러·일의 이해관계가 독일만큼 첨예하지 않다. 독일보다는 변수가 단순하다는 논리이다.

또한 분단의 과정이 이미 빛바랜 1945년 직후의 냉전체제의 산물이므로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통일의 과업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북한 당사자의 통일의지와 노력을 업그레이드 하기위한 역사교육, 통일교육을 강화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번 연수를 마치면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통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서독에서 통일을 향한 독일인들의 노력-아데나워의 친서방정책, 브란트의 동방정책, 콜 수상의 서방과 동방정책의 융합정책, 그리고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통일로 이어지는 단계에서 독일인들의 대응 과정, 통일 이후 2012년까지의 경제·사회·문화 등을 통합하기 위한 독일의 일관된 통합정책-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둘째, 민주시민 교육을 더욱 강화해야한다. 서독인이 통일 전후에 보여준 것과 같은 성숙한 시민정신(동독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재정 보정 제도 등에 적극적으로 동참)을 통일교육과정에 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 민주시민 교육이 통일한국에 필요한가, 민주 시민교육과 통일의 상관성 등에 관한 철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독일의 식자층과의 인터뷰 및 토론과정에서 한반도 통일을 위한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 의견이다.

통일을 위한 역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교육에서 분단의 과정, 통일을 해야하는 이유 등 통일을 향한 내부적 의견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숙명으로 반드시 민족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새로운 기회로 인식, 국민적 여론을 결집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인이 이룩한 통일을 우리 민족이 이룩해내지 못할 이유는 결코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도 역동적이므로 어려운 통일 과업을 능히 헤쳐나가리라 전망한다.’는 독일의 식자층들의 말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조왈남 / 천안 신당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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