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1년 3월 1일

김호림의 고구려탐방 |고구려, 청룡하 기슭의 ‘국서대혈(國西大穴)’ 2011년 3월호

김호림의 고구려탐방

고구려, 청룡하 기슭의 ‘국서대혈(國西大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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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가촌 어귀

현성에서 북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단가구(段家溝)는 현성 남쪽에 있는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고향 고죽성(孤竹城)처럼 역시 전설적인 고장이다. 노룡(盧龍)의 현지(縣志)에 따르면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인 서기 638년 산서성(山西省) 단(段)씨 성의 사람이 이 골에 와서 이삿짐을 풀면서 최초로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고려동(高麗洞)은 마을에서 1㎞ 남짓 떨어진 서북쪽의 산비탈에 있다고 한다. 동네어귀에서 서쪽으로 청룡하(靑龍河)의 기슭에 이른 후 산등성이를 타고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청룡하는 원래의 이름이 검은 강이라는 의미의 칠하(漆河)로, 일각에서 패수(沛水)라고 주장하는 난하(河)의 큰 지류이다.

마을사람들은 고려동을 옛 성의 뒤쪽이라는 뜻의 고성배(古城背)라고 부른다. 산 정상에 명나라 때의 옛 보루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보루가 사라지고 대신 ‘고려동’이라는 비석이 서 있었다. 강기슭의 산비탈에는 크고 작은 굴이 여러 개 있었다. 제일 큰 동굴인 고려동은 1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보아하니 인공적으로 굴을 넓힌 것 같았다.

옛날 기자(箕子)가 기거했던 곳?

현지에서는 고려동이 옛날 기자가 기거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정작 기자의 유물이 나타난 곳은 고려동이 아니라 단가구 서남쪽의 강 건너 마초(馬哨) 마을이다. 1992년 마초에서 상(商)나라의 기물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 기물 밑바닥에는 명문 ‘기(箕)’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른 기물의 내벽에도 명문 ‘복(卜)’자가 있었다고 한다. 명문 ‘기’와 ‘복’은 상나라 청동기의 휘장이다. ‘기’는 또 기자(箕子) 부족의 휘장이기도 하다. 부족 휘장의 출현은 기자가 정말로 이 고장에 있었으며 백이숙제의 고죽국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삼국유사」의 고조선은 벌써 천년 전에 「당서(唐書)」를 인용하여 이 단락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고려(고구려)는 원래 고죽국이었다. 주나라에서 기자를 봉해줌으로 해서 조선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압록강 기슭 국동대혈과 쌍벽이룬 고장

노룡 부근에 산재한 많은 유적들도 단연 이 주장에 가세한다. 노룡현지에 따르면, 고려동의 북쪽으로 10여 ㎞ 상거한 몽산(夢山)은 일명 묘산(墓山)이며 고려 국왕이 묻혀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통상 조선이나 고구려를 모두 ‘고려’라고 호칭한다.

고려 국왕이 ‘조선 국왕’이라면 고죽국이 기자조선이며, ‘고구려 국왕’이라면 고죽국이 고구려였다는 것으로, 결국 고죽국이 고구려이며 나아가 기자조선이라는 설을 방증하는 셈이다.

그런데 청룡하 상류의 열하(熱河, 지금의 승덕) 부근에는 정말로 ‘고구려 지경’이라는 글씨가 있는 바위가 있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다. 더구나 일명 고려성(高麗城)이라고 불리는 옛 성곽이 산해관 남쪽에 여러 개나 잔존하고 있는 현 주소이다.

따져 보면 옛날 상나라를 떠났던 기자가 이곳에 기거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기자가 재상으로 있었던 상나라의 사람들은 일찍 난하 기슭에서 생활했으며 고죽국과 뿌리가 한데 얽혀 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마침 고려동 부근은 또 과수의 본산지로,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전국책(戰國策)·연책(燕策)」은 연나라의 “북쪽은 대추(음식)와 뽕나무(의복)의 이로움이 있어 주민들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며, 대추와 뽕나무는 백성들을 먹이고 입힐 수 있는 천혜의 땅이다.”라고 하고 있다. 기자가 기거하고 있었던 3천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상이었다고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기자가 기거했던 곳은 평지의 가옥도 아니고 산성도 아닌 동굴이다. 이 동굴이 구경 기자가 잠시 머물렀던 숙소였는지, 아니면 그 어떤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기자의 은닉처였는지는 아직 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고려동이 산비탈에 은밀하게 숨어있으며 또 항일전쟁시기 촌민들이 전란의 피난지로 이용한 사실은 후자에 무게를 실어준다. 아무튼 기자의 동굴이 후세에 깊은 낙인을 남긴 것만은 명명백백하다.

「삼국사기」는 “고구려는 풍속에 음사(淫祀)가 많고 영성(靈星) 및 해(日), 기자(箕子), 가한(可汗) 등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나라의 왼쪽에 큰 굴이 있어서 이를 신수(神隨)라고 하며, 매년 10월 왕이 이들에게 친히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굴은 바로 국내성 동쪽의 압록강기슭에 위치한 큰 동굴, 즉 국동대혈(國東大穴)로 비정되고 있다.

10월 3일은 하늘이 열리는 개천의 날로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날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제사를 지내는 날이 마침 10월인 것도 재미있지만 동굴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게 참으로 공교롭다. 하필이면 고구려와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한 동굴에서 제사를 지낼 일이 있었던가?

단군신화의 ‘곰 동굴’과 기자전설의 ‘고려동’, 고구려 제사의 ‘국동대혈’은 천년의 시공간을 헤가르고 그렇게 하나로 합쳐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고려동은 고구려라는 나라의 서쪽 변계에 있은 커다란 동굴 즉 ‘국서대혈(國西大穴)’이 아닐지 모른다. 실은 압록강 기슭의 국동대혈과 쌍벽을 이루는 고장이라는 것이다.

김호림 / 북경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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