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6년 1월 1일 0

이달의 인물 | 조희제, 최득수 2016년 1월호

이달의 인물 | 조희제, 최득수

염재 조희제, 항일 애국지사 행적을 기록하다

염재 조희제(1873. 12. 10.~1939. 1. 9.) 선생은 조선의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 의병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항일의식이 투철한 집안에서 자랐다. 일제에 맞서 목숨을 끊은 송병선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기우만 의병장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선생은 수십년에 걸쳐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투사들의 항일사적과 애국지사들의 행적 등 항일투쟁 기록을 모았다. 또한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의 재판 과정을 방청하며 기록하기도 하였다. 명성을 떨치고 그 행적이 역사에 잘 기록된 인사보다는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충절을 기록했다. 선생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책의 표지에 덕촌수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질은 책상 위에 두고, 1질은 궤짝에 넣어 마루 밑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러한 편찬 사실이 1938년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서문을 썼던 최병심, 발문을 썼던 이병은, 교정을 보았던 김영한 등과 함께 선생은 임실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선생의 글은 물론이고 집안 대대로 간직해온 다양한 자료들이 모두 압수되었다. 임실경찰서에 연행되어 거의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집으로 돌아왔으나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일제의 단발 종용에 결국 자결 순국하였다. 다행히도 마루 밑에 보관해 두었던 덕촌수록을 해방 후 선생의 제자인 조현수가 염재야록으로 간행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병은이 발문에서 평한 대로 염재야록은 당시 의병운동사와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정부는 항일 의병과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목숨 걸고 기록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득수 이등상사, 격렬한 포탄 뚫고 선두로 돌진!

국가보훈처는 최득수(1927. 5. 15~ ) 육군 이등상사를 1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하였다. 전투가 한창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던 1953년 6월 26일 강원도 양구 인근, 중공군은 야포와 박격포의 지원사격 속에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해 아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비석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에 최득수가 배속되어 있는 국군 제7사단 8연대 2대대는 백병전까지 치르며 격렬한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적 수류탄에 대대장까지 전사하는 등 수차례에 걸친 역습에도 적은 좀처럼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으로 우리 측 인명 손실만도 1,3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전투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었다.

6월 30일 새벽 2시 제8연대 2대대는 최후의 결단을 실행한다. 전우의 희생을 보다 못한 2대대는 30명의 대대원으로 이루어진 특공대를 조직한다. 수많은 전우의 목숨을 앗아간 비석고지에 설치된 기관총 진지에 이르자 특공대 제1조장인 최득수는 곧바로 선두에 서서 돌진해 나갔다. 격렬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 특공대는 적의 기관총이 파괴되었음을 알렸고, 특공대의 신호탄과 함께 대기하던 아군은 새벽 4시30분 진지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전투가 끝났을 때 특공대원 30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최득수를 포함해 5명에 불과했다. 최득수와 그들 특공대원이 아니었다면 그날의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댓글 0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 해야 합니다.

좋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