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6년 1월 1일

명사의 고향을 가다 | 대한민국 슈바이처가 시원하게 뚫어드립니다! 2016년 1월호

명사의 고향을 가다 | 권성원 강남차병원 석좌교수

대한민국 슈바이처가 시원하게 뚫어드립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종로에서 동대문 그러니까 흥인지문을 바라보고 가다 보면 왼쪽 언덕바지에 큰 병원이 있었다. 19세기 말, 정확히는 1887년 11월에 이화학당을 세운 선교사 스크랜튼이 세웠던 병원이다. 구한말까지 우리나라에는 내외법이 있었고 여성은 남성에게 어떤 경우에도 몸을 보여줄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여성들은 병이 나도 남자의사가 진맥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기막힌 동방의 나라 사정을 알게 된 여자 선교사 스크랜튼이 여성을 보호하고 구한다는 뜻으로 보구병원(保救病院)이라는 여성전용병원을 세웠다. 그 뒤에는 우리나라 여성의료의 문을 연 여선교사 셔우드 홀(1893~1991)이 와서 이 병원을 활성화시키고 거기에 간호사양성소까지 세워 개화기 조선에 여성을 위한 전용병원을 운영해 나갔다. 그 병원은 현대사 속에서 이화여자대학부속병원이 되어 서울 남쪽의 진료를 담당하고 여성들을 위한 전문병원으로 동대문과 함께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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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대학병원에 난데없는 남성 비뇨기과 전문의?

그 병원에 1970년대부터 한 남성 의사가 들어와 비뇨기과를 전담하였다.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남성들의 비뇨기계통 질병, 속칭 하수도과를 담당하는 칼잡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한국 제일의 여자대학 부속병원에 웬 난데없는 남성 비뇨기과 전문의? 사람들은 의아해했고 병원 당국에서도 ‘이거 잘 하는 짓인가’하는 의구심을 안은 채 권성원 박사를 비뇨기과 과장으로 임명하고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대문시장, 평화시장, 광장시장에서 바쁘게 장사를 하며 오줌을 참던 중장년 상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황황히 아랫도리를 움켜쥐고 급한 대로 이대부속병원으로 달려갔다. 키가 크고 말솜씨가 좋은 그 친절한 의사는 환자를 달래면서 차분히 진료를 해주었다.

“이거 별 거 아니에요. 나이가 들면 전립선이라는 것이 호두알 만하게 커져서 오줌통을 막기 때문에 불편하게 된 거예요. 제가 시원하게 뚫어드릴게요.” 이렇게 해서 하루가 급한 상인들의 오줌통을 뚫어주기 시작하자 상인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거, 여자대학 비뇨기과에 명물 하나가 들어왔어. 아, 생긴 것도 멋지게 생겼어. 키 크지, 잘 생겼지, 말 잘하지, 수술 잘하고 진맥 잘하지. 자네도 참지 말고 어서 가봐.”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동대문 일대의 상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권성원 박사를 사이비종교의 교주만큼이나 굳게 믿고 섬기게 되었다. 그 복음의 소식은 빨리도 퍼져서 인근 창신동과 신설동 일대까지 빛과 소금의 소식이 전해지게 되고 이대부속병원의 비뇨기과는 항상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그 환자들의 대부분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투박한 북한 말씨를 쓰고 있었고 황해도나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대문 일대에는 유난히도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료를 하는 동안 잘 생긴 권성원 박사는 추임새를 넣었다.

“아버님, 저도 삼팔따라지야요.”, “아니 권 박사도 삼팔선을 넘었어요? 고향이 어디신데?”, “제 고향은 가까운 곳입니다. 철원하고 붙어 있는 강원도 이천군이에요.”, “아니, 경기도에 있는 이천이 아니고? 강원도에 이천군이 있었던가? 아무튼 삼팔따라지라니까 형제같구먼.”

그렇다. 사람들은 경기도의 이천은 알지만 권성원 박사의 고향 강원도 이천군(伊川郡)은 잘 모른다. 더구나 지금은 철원군으로 통폐합되어 북한에서도 없어진 그의 본고향 안협면(安峽面)은 아는 사람이 없다. 북한 지도를 보면 철원군 동북쪽에 붙어 있는 군이 바로 강원도 이천군인데, 군 전체가 안옥한 분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원래는 그 이천군이 편안할 안자, 골짜기 협자를 쓴 안협군이었다고 한다.

 

제 고향은 강원도 이천군이에요

이름 그대로 아늑하고 북한 땅에서도 유례가 없이 겨울 추위를 느낄 수 없는 아늑한 고장이다. 그 중심부를 임진강 줄기가 뚫고 지나가기 때문에 철부지 아이였던 권성원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임진강 지류에서 멱도 감고 고추 자랑도 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연 때문에 우리나라 제일의 고추 박사, 하수도 박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권성원 박사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까지는 아니지만 은수저 정도는 물고 태어난 듯 싶다. 그의 아버지 권용설옹은 그 시절 서울의 명문 선린상고를 나와 숫자와 이재에 밝은 나머지 이천군의 금융조합 이사로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갑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돈을 빌려간 순박한 이천군의 농민들은 고맙다고 하면서 꿩, 메추리, 토끼 같은 것을 노상 갖다 주었기 때문에 소년 권성원이 자라던 그 복도 안팎에는 말린 꿩, 메추리, 토끼들이 걸려 있었고 남들은 만주에서 가져온 콩깨묵과 좁쌀로 끼니를 이을 때, 권성원 소년의 집에서는 꿩고기 튀기는 냄새, 메추리고기로 냉면을 비비는 냄새, 그리고 그 맛이 일품인 토끼고기볶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함흥사범을 나와 보통학교 훈도를 했던 어머니 신태숙 여사는 희한한 이야기를 소년 권성원에게 들려주었다.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이효석은 조선 제일의 단편 소설가이다. 하지만 그가 공부를 할 때는 집안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공부를 썩 잘해서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제일고보를 나왔고 그 당시에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들어가기가 어려웠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에 들어갔다. 그때 수재 이효석이 강원도 이천군의 금융조합 권용설 이사를 어떻게 알았던지 이천군까지 찾아왔었다고 한다.

“학비를 대 주십시오.” 아버지 권용설 이사는 물었다. “학비를 융자해 달라는 말인가, 아예 대 달라는 말인가?” 이효석이 대답했다. “입학금만 대 주십시오.” 권용설 이사는 흔쾌히 입학금을 내놓으며 이렇게 격려했다고 한다. “강원도가 낳은 수재, 열심히 공부해서 이 고장을 빛내줄 일을 해주게.”

이효석은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1934년 평양숭실전문의 영문학 교수가 된 후 조선의 산과 들을 주제로 한 아름다운 수필을 많이 발표했고 1930년대에 그 빛나는 <메밀꽃 필 무렵>을 내놓았다. 이런 아버지의 음덕 때문인지 자칭 ‘하수도과 칼잡이’인 권성원 박사는 글쓰기에도 능하다. 자신이 동대문 이대부속병원에서 수많은 실향민들을 만나며 그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꼼꼼히 메모해 두었다가 연전에는 <아버지 눈물>이라는 책을 펴내 인세로 7천만원을 벌었다. 요즘 어떤 전업작가도 책을 펴내어 7천만원의 인세를 벌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 보이지 않는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번 돈 7천만원은 시골 벽지의 노인들을 위한 전립선 치료에 온전히 썼다. 이번에도 <아버지 마음>이라는 책을 냈는데 그를 따라다니는 신도들이 벌써부터 줄을 서서 책을 구입하고 있다.

그는 참으로 안팎 스토리가 많은 사나이이자 의사이다. 일본에 오랫동안 교환교수로 가 있어서 일본에 관한 한 정말 아는 것이 많다. 일본의 음식, 야쿠자에 얽힌 이야기, 재일교포들의 애환, 일본 병원의 속사정, 일본 술에 관한 백과사전이다. 유럽에서도 공부한 일이 있어 프랑스의 예술과 와인에도 일가견이 있다. 사정이 이쯤 되다 보니 아랫도리가 아파서 그의 진료실을 찾은 환자들은 그의 해박한 이야기 바다에 빠져 넋을 놓은 사이에 병이 낫기도 하고, 은근슬쩍 수술을 끝내고 거뜬히 걸어 나오기도 한다. 그에게 신세를 진 환자들이 동대문과 광장시장 일대에서 노상 그에게 술을 사고 맛있는 안주를 대접해서 동대문 일대의 맛집은 물론 서울 강남북의 맛집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미슐렝 별을 매기기까지도 한다.

참으로 희한한 의사이다. 그는 이대부속병원에 있으면서 인턴이나 레지던트들을 교육할 때 구닥다리 칠판 강의나 노트 강의를 하지 않고 직접 남자의 고추나 여성의 버자이너를 의인화해서 영상교육을 하였다. 그렇게 멋진 화면을 만들기 위해 영화 공부도 했기 때문에 영화감독에 버금가는 영화제작 기술도 가지고 있다.

 

육체와 마음의 병 함께 치유하는 카운슬러 명의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장기는 삼팔선을 넘어온 실향민들의 눈물어린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아버지들의 한 많은 장광설을 끝없이 들어주며 적절한 충언을 해주는 카운슬링의 기술에 있다. 전립선이나 방광염이나 신장암에 관한 심각한 병 증세와 걱정을 한아름 안고 온 환자들과 마주앉아 그들의 병 증세를 번개처럼 알아낸 뒤, 나머지 시간을 서로 이야기하고 한을 푸는 데 쓴다. 말하자면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놓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육체와 마음의 병을 함께 치유하는 진짜 명의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스토리도 많고 단골 환자가 많다.

서울 강남의 네거리에 있는 차병원은 젊은 산모들이 아기를 낳는 출산 병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그 병원의 주인은 이대부속병원에서 정년퇴임을 한 권 박사를 한사코 모셔다가 석좌교수라는 자리를 내주고 전용 진료실을 마련해주었다. 아기 울음소리와 젊은 산모들의 향기로 가득 찬 그 병원의 한구석에는 허리가 굽은 남자 노인들이 떼 지어 앉아 있다. 그 병원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카운슬링 식 진료 방식 때문에 대기 시간이 보통 긴 것이 아닌데 노인들은 대기실 구석에 비치된 <전립선>이라는 잡지를 읽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다린다. 그는 한국전립선협회의 회장이며 <전립선>이라는 무가지 잡지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발행 부수가 8천부를 넘기고 있는데 요즘처럼 출판 사정이 어려운 때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간지로 나오고 있다.

전립선협회는 생긴 지 20년이 넘었는데 <전립선>이라는 잡지까지 발행하면서 건재하고 있다. 권성원 박사는 서울의 대학병원 비뇨기과 의사들과 최고의 진료팀을 만들어 군 단위 중에서도 오지만 골라 의료 봉사를 해왔다. 올해로 14년째이다. 지난 여름에는 폭풍우를 뚫고 울릉도까지 다녀왔다. 시골 노인들에게 전립선을 중심으로 노년의 배뇨문제를 원스톱으로 해결해준다.

사실 권성원 박사가 ‘유식하다, 진료를 잘한다, 벽지를 찾아다니며 슈바이처 노릇을 한다, 글을 잘 쓴다, 훌륭한 카운슬링을 한다’ 이런 것만을 나열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은수저를 물고 나왔으니 명문의대를 나왔고, 그렇게 잘 풀렸으니 베풀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따진다면 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 땅에 가진 사람으로서, 배운 사람으로서, 유명인사로서, 75세가 넘어 체력도 달리고 하루해를 안락하게 보내기도 버거운 때에 자기 자신의 체력이나 건강을 곰상스럽게 챙기지 않으면서 온몸을 던져 일하고 봉사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노년까지 ‘사서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서 벽지에는 아직도 오줌 줄기가 갑자기 가늘어지고 오줌 누는 일이 큰 공사처럼 느껴지면서도 그것이 전립선비대증이나 요도의 문제, 신장의 문제라는 것을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는 노인들이 허다하다는 것을 권성원 박사는 알고 있다.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없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월남 이후 아무에게도 말 못한 이산의 한과 지금도 아무도 모르게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 북에 두고 온 자식들에게 송금을 하고 있는 월남 노인들의 숨은 한이 눈 녹듯 스러지고, 그들의 무궁무진한 스토리가 권성원 박사의 책이 되어 후대에까지 남게 될 것이다.

권성원 박사는 1946년 해방 이듬해 아버지의 등짐 위에 앉아 한탄강을 건너던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그때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삼팔선을 넘어오지 못했다면 지금쯤 아오지탄광이나 요덕수용소 언저리에서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눈 감는 그날까지 봉사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어려운 이들과 나누기를 자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늘 대한민국에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남들이 뭐라고 부르더라도 언제나 그는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하수도과의 대부인 권성원 박사의 건강도 만세이기를 빈다.

 

작가 김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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