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리의 스케치 北 | 대결과 폭력, 상처의 나이테를 어루만지다 2017년 2월호
박계리의 스케치 北 62
대결과 폭력, 상처의 나이테를 어루만지다
작가 임민욱은 근대화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숨겨진 것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침묵 속에 존재하는 요소들에 주목하고 이들을 다시 역사 위로 들춰내는 작업들을 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근대기 우리에게 닥친 분단을 통한 장소의 상실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장소의 상실. 잘려진 허리. 없어진 반쪽. 분단 문제 또한 그의 작품에서 계속적으로 흐르는 화두다.
그는 자신이 명명한 “근대화의 유령들”을 따라 역사를 호출하곤 한다. 과거를 통해 예술가적 시선으로 미래를 상상하고, 그 미래에 서서 다시 현재를 응시한다. <절반의 가능성> 이라는 작품 또한 그러하다. 임민욱의 <절반의 가능성> 은 영상과 설치 작품이 결합된 작품이다. 이 작품 영상에서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장례식 때 카메라가 포착한 집단 슬픔의 기록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장례 영상은 결국 거대한 폭발 장면으로 역전된다. 다음 장면은 욕망하고 있지만 잡지 못하는 두 개의 내민 손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화면 앞에는 방송국 뉴스데스크와 같은 공간이 설치되어 있다. 작가는 분단에 대한 제도화된 기억들을 만들어내는 데 주요하게 작동하고 있는 미디어의 문제에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 장례식에 참석해 오열하는 주민들의 모습들이 오버랩 되는 화면 속에서 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맹목화 되고 있는 미디어와 평범한 주민들의 눈물, 그 간극에 대해 묻는다. 한반도의 가능성은 미디어와 이데올로기의 승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인간의 본능인 눈물의 힘,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파괴와 융합의 과정에서 나온다는 그의 메시지는 화면의 폭발력만큼 강력하게 전달된다.
“통일, 흐름을 회복하는 것 아닐까요?”
작가는 이 눈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는 원래 움직이는 것, 탈 것, 그리고 흐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몸에서는 전이의 결과로 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무엇이 움직여 녹아내리는 걸까, 시체는 아파하지도 않고 눈물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아픔을 겪는 것이고 측은지심이라는 것도 짐승과 다른 인간다움의 측면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움직이는 것은 어디론가 흘러들어가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를 만들어 전복성을 지니기도 합니다.
넘치는 기쁨과 아픔의 상반된 두 감정에 대한 증거가 바로 눈물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서로의 눈물샘이 남북한 분단 상황의 공동구역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눈물샘은 서로에 대한 상실에서 솟구치고 고갈되는 한편, 끊임없는 싸움을 통해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두 눈물을 비교하며 공통된 것을 찾고 싶었습니다. <절반의 가능성> 2채널 프로젝션은 그런 눈물의 갈림길을 형식적으로 표현해본 겁니다. 눈물의 가능성이 전복되어 흐르게 될 때를 상상해 보고 싶었거든요. 통일은 하나가 된다기보다 흐름을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흐름은 아름다움과 밀접한 관계에 있고 그렇게 흐르는 눈물 속에서 우리가 어디서 비롯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해보고 싶어 <절반의 가능성>이라는 제목도 떠올렸습니다. 흩어져있는 공동체의 눈물은 그리워서 흐르기도 하지만, 미래에는 막힌 것을 뚫어내는 힘으로 흘러 반가움으로 넘쳐날 수도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어디론가 흘러들어가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흐름, 그 불안정과 불확실함이 결국은 막히고 중단된 것을 뚫어내는 전복성을 지닐 것이라는 작가의 믿음이 읽혀진다.
눈물의 현실 화면은 임민욱의 작품 속에서 결국 이데올로기의 땅을 폭발시킨다. 카리브 해의 과들루프 섬에서 담아낸 이 장면은, 과들루프가 상징하는 열대 한국이라는 미장센을 통해 원초적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근대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들 간의 이분법적인 충돌이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논하든 그 이후의 시대를 논하든 간에 여전히 ‘근대’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이 땅은 폭발되어 사라진 후에 다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의 따뜻함을 호출한다.
그의 이러한 바람은 열 감지 카메라로 찍은 따뜻한 손으로 다시 나타난다. 시각적으로 달라 보이는 두 손을 열 감지 카메라로 바라보면 같아 보인다. 인간의 체온은 누구나 같기 때문이다. 그의 화면은 서로 다른 듯 보이는 두 손이 실은 같은 온도를 가진 동질의 손임을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 만나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많은 ‘불일치(dissensus)’를 만난다. 남북 분단의 화두 속에서 그 ‘불일치’는 대결과 폭력과 상처로 나이테를 쌓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들 ‘불일치’를 대하는 임민욱의 시선이, 우리가 ‘불일치’를 마주할 때마다 호출되기를 바란다. 흐르게 하는 것,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 보는 것, 보이는 것 이면의 원초성을 상상해보는 것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우리가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잘려진 한반도, 그 절반의 가능성에 대해 다시금 우리가 상상해 보기를 제안하고 있다.
박계리 /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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