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리의 스케치 北 | “진실은 생활 주변에 있다” 2017년 6월호
박계리의 스케치 北 66
“진실은 생활 주변에 있다”
지난 5월 갤러리 현대에서는 월남 화가 박고석의 전시가 열렸다. 그는 1917년 평양에서 독립운동가인 박종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평안남도 대동군 하리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 중에 독립선언 연설과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복역한 바 있고, 이후 평양 YMCA를 창립하는 등 청년운동에 앞장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아버지는 큰형을 데리고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박고석이 소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가족의 이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미술에 눈을 뜬 박고석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유화를 배우기 시작한다. 대학 졸업 후 도쿄에서 개인전도 열고, 송죽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만화영화제작부에서도 근무하다가 잠시 귀국한 사이 불현듯 해방을 맞았다. 평양에 있던 그는 친구들과 서울로 내려왔는데, 그 길로 다시는 어머니가 계시는 평양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박고석은 피난 시절의 부산을 화폭에 담곤 하였다. 먹고 살기 위해서 화가 김병기는 역전에서 토스트를 구워 우유와 함께 팔았고, 이중섭은 미군 부대 배의 기름을 치던 시기였다. 박고석은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한 구석에서 밥장사랍시고 천막을 쳤다. “이중섭 형과 정묵 형, 몇몇 선후배들과 함께 나눠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는 담담한 그의 이야기. 자신도 어려웠지만 자신처럼 부모를 떠나 월남했던 이중섭을 집에 묵게 했고, 훗날에는 이중섭의 유골을 나눠서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박고석. 이산의 아픔을 공유했던 이들의 우정은 피보다 진했다.
“나는 정오의 광선을 덜 좋아합니다. 눈이 부셔서가 아닙니다. 물체에 ‘하레이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석양이 가까울 무렵 오후의 광선이 한없이 좋습니다. 인간의 연약한 육체가 능히 가까이 할 수 있는 광선입니다. 이 연약한 인간은 또한 녹이 슨 철판으로 구겨진 공장지대라든지, 기름때가 낀 부두 풍경이라든지, 기관차들이 법석거리는 정거장의 야경이 뿜는 적황색의 깜빡이는 불빛들이 좋아 그려왔습니다. 그저 보잘것없이 버려져 있는 곳에서 눈에 띄는 지극히 인상적인 관조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자꾸 절실해지는 느낌입니다.”(박고석, ‘내가 좋아하는 소재 – 역시 사람이 좋아요’, <동아일보>, 1961년 9월 6일자)
박고석, 이산의 트라우마 안고 산으로, 산으로
그의 이야기처럼 그의 화폭에는 후광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피난 시절이 고달픈 서민들의 일상이 담겨 있다. 얼굴의 눈코입이 사라진 그의 화면 속 인물들은 이 시절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상처에서 피어나는 인간애의 진실이 그의 화면이 지닌 힘이다. 자연을 소재로 삼을 때에도 이러한 그의 미학관은 동일했다.
“나는 짜임새로 꽉 짜인 자연의 오묘함을 감히 화폭에 옮길 생각은 엄두도 못 낸다. 산은 수려하면 할수록 그 수려함으로 인해 어떠한 저항 같은 것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장엄, 아득한 심산(深山)의 정상에 서면 그저 황홀하고 감회만 깊어갈 뿐, 나의 그림의 소재로서는 영 거리가 먼 것이라고 믿어 왔다. 마치 화려하기 그지없는 미인을 대할 때와 같은 당혹하는 느낌이 앞장선다. 산생이 자꾸 반복되면서 점차 나의 마음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자연의 스타와도 같은 명산 속으로 끌려들어 가면서도 한 가닥 허술한 구석이 눈에 뛸 때 나의 가슴은 설렌다. 내 나름대로의 우둔한 붓 자국을 남기고 싶은 마음 … 나는 허술한 화필로 격한 나의 마음을 달래 본다.”(박고석, ‘내가 좋아하는 소재’, 「화랑」, 1974년 봄)
허술한 구석에 교감하고픈 화가는 끊임없이 산을 올랐고, 이를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산을 그리는 화가가 된 박고석은 자신이 화가가 된 동기와 함께 고향 평양의 자연을 언급했다. “내가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던 이유나 계기를 생각해 볼라치면 복잡한 나의 젊은 시절의 성장 역적을 아니 느낄 수 없다. 고향인 평양이란, 그 고장이 우선 인간으로 하여금 정서적인, 혹은 시 정신 같은 것을 간직하게끔 수려치묘(秀麗致妙)한 자연적 조건을 너무나 많이 간직하고 있다 하겠다. 산수의 짜임새가 보통이 아니었다. 인가를 멀리하고 고고히 그 절묘의 가경(佳境)을 이룩하고 있는 어떠한 깊숙한 고장의 절경과도 다르다. 대동강이란 것도 시대 한복판을 남북으로 흐르고 있으니 누구 누가 거의 매일같이 대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아쉬움과 친밀감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소박하고 시골 냄새가 풍기는 보통강 벌판을 맑은 태양 아래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자연이 북돋아주는 영향은 지대한 것이리라.”(박고석, ‘화가가 된 동기와 이유’, <세계일보>, 1959년 1월 30일자)
평양의 자연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인간의 발길이 끊긴 깊숙한 산속의 기암절벽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시내 한복판에 있는 대동강처럼 누구나 매일 즐길 수 있는 소박한 모습 때문이었고, 이러한 자연이 자신의 미학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라를 잃고, 독립운동으로 가족들이 이산되고, 전쟁과 분단의 과정에서 또 다시 흩어진 삶. 피난과 폐허, 그 이후 근대화 과정들의 여러 편린들을 묵도하며 살아낸 박고석 세대에게 ‘사람’이란 그리움의 존재임과 동시에 세상을 파멸로 이끌고 갈 수 있는 너무나도 불완전한 존재 아니었을까? 그래서 진실을 찾고자 하였던 그의 화폭은 인간의 모습에서 점차 인간을 품고 있는 자연으로 확대되어 갔다.
“진실은 생활 주변에 있는데, 산은 내 주변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공감을 주는 진실이다.”라는 그의 언급처럼 그는 쉼 없이 인간세상 문제의 핵심을 풀기 위해 진실을 찾아 산을 탔고, 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는 이산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였던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그는 여행자가 되었다. 그 자신의 세속적 삶을 하나의 여행으로 가정하고 있었다. 비석 하나도 세우지 말라는 그의 유언처럼 여행 가듯이 떠난 박고석. 결국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그는 여행자처럼 이곳도 홀연히 떠나갔다.
박계리 /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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