콕! 집어 개념풀이 | 돌격대 2017년 9월호
콕! 집어 개념풀이
돌격대
북한은 지난 2012년 신년공동사설에서 김정일의 유훈을 받들어 선군혁명 계승과 더불어 강성국가 건설을 위한 돌격대의 역할을 강조하였습니다. 과거 1978년 제2차 7개년 계획안에서도 인민경제의 주체화·현대화·과학화의 3대 정책을 추진하면서 각 전문 분야별로 ‘과학자·기술자 돌격대’를 조직하였는데요.
이처럼 돌격대를 각 생산현장에 파견시켜 기술혁신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하며 주로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혹은 당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활용하기도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북한이 새로운 대규모 건설을 추진할 때나 조직력을 과시할 때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돌격대’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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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선중앙방송>은 7월 19일 양강도 삼지연군의 개발 상황을 전하며 “삼지연군을 혁명의 성지답게 꾸리기 위한 투쟁이 힘차게 벌어지는 속에 베개봉 일대에 풍력 및 태양빛발전소가 새로 일떠서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건설자들은) 단 이틀 동안에 우리의 힘과 기술로 만든 풍력발전기 1호기의 설치를 끝내는 성과를 이룩했다”며 “돌격대원들은 풍력발전기 2호기, 3호기 설치 준비사업을 다그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 2017년 7월 19일
북한의 보도매체에 등장하는 ‘돌격대’는 다양한 집단을 지칭하고 있는데요. 스탈린 시대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1928~1933년) 동안 전위대 역할을 수행했던 돌격대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것처럼, 북한 역시 주민들의 집단적 노력 동원 조직을 지칭하는 의미 외에 정확하게 규정짓지 않은 채 사용되어왔습니다.
광복 이후 북한에서 돌격대 운동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46년 2월에 개최된 평양철도공장 종업원대회에서 ‘3·1운동기념 생산돌격대운동’ 조직 문제가 거론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이 흐른 후 돌격대 운동에 관한 언급은 점차 많아졌습니다. 크게는 한국전쟁 전후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요. 한국전쟁 이전에는 공장이나 광산 등지의 ‘생산돌격대’, 농촌 지역의 ‘(양곡)성출완수돌격대’, 보통강 개수 공사에 동원된 ‘야간돌격대’ 등이 조직됐습니다. 이 돌격대 운동의 주축은 대부분 청년층 당원 및 행정기관 구성원들에 국한되었는데요. 청년 노동자층의 체계적인 조직화와 동원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후 복구 시기와 1960년대에는 북한 사회 전역에서 집단주의 규율이 지배하고, 생산 및 건설 현장에서는 개인·집체별 노력경쟁과 집단적 혁신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돌격대의 가장 대표적인 성과가 나타나는데요. 바로 ‘해주-하성 간 광궤철도’ 공사입니다. 이 철도 개통식(1958.8)에서 김일성은 “건설 사업의 속도와 양적 성과가 강조되고, 청년돌격대가 군대식 편제에 따라 조직되며, 군대 규율을 준용한 노동 규율에 기초해 돌격대가 운영됐다”고 치켜세우기도 했습니다.
청년돌격대는 ‘민청청년돌격대’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명칭이 조금씩 변화되어왔는데요. 명칭의 변천사를 잠시 살펴보면 한국전쟁 때에는 ‘전선지원청년돌격대’, 1954년에는 ‘수도청년건설대’, 1958년에는 ‘기술혁신청년돌격대’, 1970년에는 ‘전국청년돌격대’, 1973년에는 ‘4·25청년돌격대’, 1975년에는 ‘속도전청년돌격대’ 등 시대적 혹은 상황에 따라 변화되어 왔습니다.
앞서 살펴본 특징을 토대로 돌격대의 정의는 ‘어떤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기한의 단축, 조직력의 과시, 규율 확립을 통해 당의 정책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라고 파악할 수 있겠죠.
김슬기 /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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