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6월 2일

명사의 고향을 가다 | 질곡의 대한민국 현대사 속 살아있는 호국의 인물 2015년 6월호

명사의 고향을 가다 | 이대용 前  주월 한국대사관 공사

질곡의 대한민국 현대사 속 살아있는 호국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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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인 남침을 했던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6월 28일 새벽 서울 중앙청 앞에 그들이 몰고 온 소련제 탱크 T-34를 위세당당하게 세워두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당하고 정부는 대전으로 밀려 내려가 풍전등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울에서 사흘간 북한군들은 옴짝달싹하지 않고 멈춰서 있었다. 만약 그때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사흘’을 쉬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지도 위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 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 사흘 동안에 대전으로 내려갔던 이승만 대통령이 수원 비행장으로 달려오고 도쿄에서 사태의 추이를 보고 있던 맥아더 장군 역시 전용기인 바탄호를 몰고 수원 비행장으로 와 조우한다. 이렇게 수원에서 만난 일흔다섯의 노(老) 대통령 이승만과 당시 일흔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곧장 한강가로 달려가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왜 북한군은 서울에서 사흘을 허비하였던가.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지금도 연구 중에 있다. 첫 번째 가설은 전쟁을 시작하여 서울만 점령하면 남쪽에 잠복해 있던 남로당들이 들고 있어나 남한은 저절로 적화된다는 박헌영의 호언장담을 믿었던 ‘김일성의 오판’을 들고 있다. 두 번째 가설은 한강철교와 인도교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도하장비가 부실했던 북한군의 공병대원들이 한강철교를 손보고 그들의 탱크부대가 한강을 건너기 위해 사흘이 필요했다는 설이다. 마지막 세 번째 가설은 춘천을 방어하고 있던 한국군 제6사단의 엄청난 용전 덕분에 북한군 제2군단이 춘천 방어선을 뚫는 데 사흘이 걸리고 그 사흘이 대한민국을 건졌다는 것이다.

이 세 번째의 가설은 사실상 가설이 아니라 전술적인 진실이다. 당시 대령이었던 김종오 사단장과 그 용맹한 6사단 병력이 춘천 전선을 훌륭히 방어해냈기 때문에 의외로 빨리 서울을 점령했던 인민군 제1군단 예하 3사단, 4사단이 서울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전술은 제1군단이 서울을 점령하는 시간에 맞춰 북한군 제2군단은 춘천을 점령한 후 아주 빨리 장호원과 수원지역으로 내려가 국군을 수원축에서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그 전술적 전진 속도가 춘천 전선에서 허물어지는 바람에 북한군 전체의 전진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미 다 밝혀진 내용이지만 격노한 김일성이 제2군단장 김광협의 지휘권을 빼앗고 강등시키고 수도 서울을 점령한 기쁨마저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6·25 초기 북한군 발목 잡은 ‘춘천대첩’ 숨은 주역

그 역사적인 ‘춘천전투’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웠던 제6사단 제7연대 제1대대장은 지금 전쟁기념관 호국인물관에 모셔져 있는 김용배 준장이다. 바로 이 김용배 준장의 춘천 제7연대 제1대대의 선두중대 제1중대장을 맡아, 김용배 장군에 못지않게 용감하게 싸웠던 대위 이대용이 이달의 주인공이다.

이대용은 살아 있는 전설이며 서울 하늘 아래에서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는 호국의 인물로, 진짜 군인이다. 노령으로 허리가 약간 굽고 두 다리를 지탱하는 발목이 약해져서 조금씩 절룩거리는 것 같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신사복이 꼭 군복 같고 그의 굽은 어깨 위에서는 아직도 별 두 개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고향은 지금은 북한 땅이 되어 버린 황해도 금천이다. 개성의 북쪽에 위치하여 서울로부터 과히 멀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이대용 장군은 지금도 틈이 나면 도라산 근처 전망대 위에서 고향 땅의 허리를 휘감아 흐르는 예성강을 가늠해보곤 한다. 그러나 노장 이대용은 고향이나 두고 온 산하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고향을 찾은 것은 1950년 가을 38선을 뚫고 북진했다가 내려오면서 아주 짧게 들러보았던 것이 전부이며 고향에 관한 추억도 그쯤에서 멈추어 있다.

전쟁이 나던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비가 왔다. 이대용은 죽림동 하숙집에서 아침을 먹고 산중턱에 있는 도서실에 가기 위해 군복에 장화를 신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때 제1중대 연락병 안기수 하사가 달려왔다. “중대장님,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쳐들어온답니다. 빨리 부대로 들어오십시오.” 이대용 중대장은 도서관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부대로 뛰어갔다. 그는 그 후로 하숙집에 들르지도 못한 채 제6사단의 선두 중대장으로, 싸우고 또 싸웠다. 춘천을 사흘간 포화 속에서 견디며 사수했다. 바로 그 전쟁이 ‘춘천대첩’이었고 그 춘천대첩이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다.

그의 부대는 싸우면서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고 낙동강가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인민군 부대와 육박전을 치렀다. 그리고 그해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적의 보급선을 자르며 인천에 상륙하고 9월 28일 서울을 점령하자 그의 부대는 38선을 돌파하고 평양을 가로질러 한국군 최초로 평안북도 초산을 점령한다. 그리고 압록강의 푸른 물을 수통에 담아 한국군 최초의 전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올렸다. 우리가 흔히 6·25 전사를 말하면서 번개처럼 북진하던 국군들이 압록강까지 이르렀고 그때 국군은 ‘압록강의 물을 기념으로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올렸다.’라는 구절을 쓰고 인용하는데, 그 수통과 전과의 주인공이 바로 이대용 대위였던 것이다.

중공군 참전 후 ‘중대 편제 유지’하며 500km 후퇴

그러나 전세는 역전되었다. 압록강에 살얼음이 끼던 그해 11월부터 중공군이 물밀 듯이 밀려와 ‘이제 통일이 되었다. 북한 통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하던 국군과 유엔군을 덮쳤다. 중공군의 전진 속도가 워낙 빠르고 국군이나 미군들은 그 엄청난 중공군들이 참전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에 퇴로가 일시에 차단되었다. 그래서 북진하였던 모든 유엔군들과 한국군들이 자신의 부대들을 추스르지 못하고 허둥지둥 퇴각하였다. 압록강 쪽으로 달려갔던 미군들도 많이 포로가 되고 길거리에 쓰러졌다. 그때 나왔던 이야기들이 그 유명한 ‘흥남 철수’가 되었고 얼마 전까지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영화 <국제시장>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중대 이상의 규모로서 편제를 제대로 유지한 채 후퇴할 수도 없었다. 특히 다른 부대와 달리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멀리 북쪽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제6사단은 중공군들에게 여러 겹으로 포위가 되어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1950년 겨울 이대용의 제7연대 제1중대는 키 175cm인 이대용 중대장의 철모를 깃발로 삼아 산을 넘고 들을 지나 장장 500km를 후퇴하였다. 1950년과 51년 초를 기점으로 압록강에서 38선까지 부대의 건재를 유지하며 질서정연하게 살아 돌아온 중대는 이대용 중대뿐이었다.

그 후 이대용은 주월 한국대사관 무관을 거쳐 장군이 되었고 베트남전이 한창이었던 1960년대 중반부터 그는 주월 한국대사관의 경제담당 공사로 근무하게 된다. 사실은 그가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미 태평양지구 합동참모학교와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을 다닐 때 그곳에 유학을 왔던 티우라는 베트남 장교와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그가 그 시절에는 이미 베트남의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월 한국대사관에서 베트남 대통령 비서실장과 직통전화를 하고 200m가량 떨어져 있는 대통령궁의 후문으로 언제든지 들어가서 티우 대통령과 독대를 할 수 있는 주월 한국대사관 직원 중에서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을 할 때부터는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한 메시지를 들고 사이공에 있는 베트남의 대통령궁 흔히 독립궁이라고 부르는 그곳을 더 자주 들르게 되었다. 베트남의 정세가 워낙 급하게 돌아가자 한국군은 1973년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두 해는 그곳에 남아 있는 3천명 이상의 교민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일을 이대용 공사가 비밀리에 추진해 나갔다.

이미 미군들은 철수를 시작했고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던 선진국의 사업가들도 사업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1975년 2월부터 북부 월남군들은 총 공세를 시작하였고 4월에 들어서자 베트남의 사태는 카운트다운을 시작하였다.

본국에서 ‘대사관 전 직원과 교민들의 철수’라는 절박한 지시가 떨어졌다. 이대용 공사는 사이공 부둣가에 있는 한국 LST함으로 달려갔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한국 교민들보다는 눈치 빠른 베트남 고위층들의 가족과 베트남에서 부를 축적했던 화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 교민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그는 한국 교민 철수선인 우리 해군의 LST함에 출발 신호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75년 4월 28일 사이공 웬주가 109번지에 있던 주월 한국대사관은 폐쇄되었다.

사이공 중심가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사이공에 하나밖에 없는 국제공항 탄산너트의 활주로 위에도 포탄이 떨어졌다. 모두 미국대사관으로 달려갔다. 이대용 공사는 미국대사관으로 달려가야 할 그 시간에 한국대사관 소각장에서 아직 타다 만 기밀 서류들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한 번 더 한국대사관에 들렀다. 그 사이에 약속한 미군 헬기가 다녀가고 말았다. 마지막 대사관 직원 10여 명을 이끌고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갔다.

미국대사관에서 철수를 총지휘하고 있던 베넷 공사가 옥상에 있는 마지막 헬기에 자리 하나가 있으니 이대용 공사만 먼저 바다 위에 떠 있는 미 7함대 선단으로 날아가라고 소리쳤다. 이대용 공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최후까지 그를 믿고 따라왔던 대사관 직원들이 떨고 있었다. 그때 그는 1951년 겨울 그 혹한과 중공군의 인해(人海) 속에서도 제6사단 제7연대 제1중대의 건재를 유지하며 백여 명의 병사를 살려낸 기억을 되살렸다. “마지막 헬기요! 어서 타시오! 못 타면 못 갑니다!” 그는 한국대사관의 잔여 인원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했다. 이대용 공사는 사이공에 남았다.

베트남 치화형무소 5년 수감 … 형무소 보안관은 친구로

1975년 4월 30일 정오가 조금 지나 북베트남 공산군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해 들어왔다. 소련제 탱크가 베트남 대통령궁의 철책을 부수고 정문에 멈춰 섰다. 이대용 공사는 프랑스대사관 부속 건물에 피해 있다가 결국은 북베트남의 보안군에게 잡혔다. 그로부터 이대용 공사는 가장 혹독하고 무섭다는 사이공의 치화형무소에 들어갔다. 무려 5년간의 수형생활이 시작되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월남쌀밥 반 공기, 소금국, 베트남 짠지…. 배고픈 수형생활이 기약 없이 계속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의 치화형무소에 외롭게 남아 있는 공사 이대용을 빼내기 위해 일본, 프랑스와 같은 북베트남 우호국가의 수뇌들에게 부탁을 하고 베트남과 전후처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미국 측과도 부단한 연락을 취하였다. 그런데 세월은 가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였다. 한국의 현대사가 격변기를 맞던 1980년 4월 11일, 그를 감옥에서 가장 괴롭혔던 북베트남 보안장교 즈엉직 특의 보좌관이 석방서를 읽어주었다.

“석방명령서 2호, 대한민국 공사 이대용…, 석방!”

대한민국에 돌아온 그의 체중은 체포 전 78kg에서 46kg이 되어 있었다. 참으로 인생사는 이상하여서 북한에서 내려온 북한 공작원과 함께 치화형무소에서 그를 끈질기게도 괴롭혔던 즈엉직 특이 그 후 주한 베트남 대사가 되어 서울에 왔다. 오랜 고민 끝에 두 사람은 화해하고 이대용 공사를 친구로 초청해 주기도 하였다.

인생은 짧은 듯하면서 길기도 하고, 긴 듯하면서 참으로 짧다. 2015년 현재 이대용 노인은 지금도 컴퓨터를 치고 있으며, 일산에서 을지로입구로 나오는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우리 나이로 93세가 넘는 이대용 노인은 보훈처로부터 ‘호국의 인물’로 지정이 되어 자신의 집에 남아 있던 기념품과 일기장, 그리고 책과 안경을 이미 전쟁기념관에 기증한 상태이다.

대한민국을 건진 군인 이대용, 조국을 위해 차디 찬 이국의 시멘트 감옥에서 5년을 견딘 호국의 인물 이대용… 부디 강녕하시기를 빈다!

작가 김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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