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고향을 가다 | “고향을 자유롭게 찾을 수 있을 때 가지요” 2015년 1월호
명사의 고향을 가다 | 신영균 한국영화인총연합회 명예회장
“고향을 자유롭게 찾을 수 있을 때 가지요”
2015년 새해를 맞아 월간 <통일한국>에서는 북한에서 내려온 저명인사들의 인터뷰를 통해 휴전선 너머에 남기고 온 산하에 대해 추억하고, 아름다웠던 유년기의 기억을 더듬어 그 글을 남김으로써 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취재를 담당한 김광휘 작가는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과를 나온 방송작가로 코미디 ‘웃으면 복이 와요’, 정치드라마 ‘제4공화국’, 라디오드라마 ‘격동 50년’ 등을 통해 알려졌으며, 배우 윤인자의 일대기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와 배우 김진규의 일대기 <내 운명의 별 김진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편집자주).
어느 산사에 고승이 있었는데 어느 날 상좌승이 물었다고 한다. “스승님, 세월이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그러자 고승은 상좌승에게 문을 조금만 열어보라고 하였다. 그때 겨울바람이 스치면서 떨어진 낙엽을 휩쓸며 순식간에 문 사이를 지나갔다. 고승은 말했다. “세월이라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이다. 바람이 눈 깜빡할 사이에 낙엽과 함께 문 사이를 스쳐가듯 그렇게 순식간에 흐르는 것이란다.”
나는 9살 때 고향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왔는데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바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입학을 못한 게 아니라 내 스스로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였다. 한창 호기심이 많고, 인생의 가는 길을 놓고 숙고하던 그 시절에 나는 묘하게도 연극에 끌렸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때에도 크리스마스나 연말 때에는 꼭 연극부원들과 함께 대본을 쓰고 밤 새워 연습을 해서 교회나 모임이 있는 곳에서 연극을 하였다. 이미 그 시절에 ‘무대에 선다는 일’ 자체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치유할 수 없는 고질병이었다. 그래서 어머니 몰래 집을 빠져나와 극단을 찾아 나섰는데 ‘청춘극장’이라는 곳이었다. 그 시절에는 끼니를 굶으면서도 연극에 미친 사람들이 보수도 시원찮은 사설극단에 모여들었고, 굶으면서 연기를 하였다. 38선을 넘어 나처럼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나 일제시대부터 연극패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아예 가족을 데리고 극단에 들어와 있었다.
요즘처럼 추위가 심했던 한겨울이었다고 생각된다. 김춘광 단장은 대구에서 공연이 있다고 하면서 이동을 준비했다. 그 시절의 이동수단이라는 것은 숯으로 불을 지펴서 엔진을 돌리는 목탄차였다. 보닛을 열고 나무로 불을 지피고 꺽쇠모양의 발동기로 시동을 걸어서 덜덜거리며 달리는 트럭이었다. 단원들은 언제나처럼 트럭 적재함에 공연에 필요한 온갖 세트를 싣고, 바로 그 위에 변변찮은 방한복과 개털모자를 쓰고 올라탔다. 부모를 따라왔던 어린 아이들은 그 트럭 위에서 춥고 배고프다고 출발 전부터 울다가 어머니 젖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쓰러져 자고 목탄차는 추위를 뚫고 남으로, 남으로 달렸다. 대전에서 대구로 향하는 길이었다. 목탄차가 힘겹게 추풍령고개를 오르는가 싶더니 빙판 진 고갯마루에서 전복되고 말았다. 나는 그때 스무 살이 안 될 때였으니까 순발력 있게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고, 바로 일어나 차 밑에 깔린 단원들을 끌어내고 이미 목숨을 잃은 어린 아이들을 울부짖는 부모들과 함께 수습하였다. 추위가 올 때마다 어김없이 떠올려지는 아득한 시절의 악몽이다.
그 악몽 속에서도 나는 공연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극단까지 찾아오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여 서울로 올라와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고,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렇게 딴따라를 따라다니던 내가 어떻게 서울대학교 교복을 걸치고 대학생이 되었던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서도 연극에 대한 열정을 놓지 못하여 서울대학교 연극반에 들어가 또 연기를 시작하였다. 그때 미술대학에 다니던 故이낙훈 친구와 연극에 미쳐있었고, 나중에 들어 온 문리과대학의 후배이순재와도 호흡을 맞췄다. 탤런트 이순재가 팔순을 넘긴 지금에도 현역으로 뛰는 모습을 보면 못내 장하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아무튼 그때 서울대학교 연극반은 끝내 명동의 시공관, 지금의 예술극장으로까지 진출을 하였고 그곳에서 ‘하얀 중립국’이라는 대본을 가지고 연기를 하던 일이 엊그제 같기만 하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술극장의 뒷 건물이 내가 운영하고 있는 빌딩이 되었고, 지금도 내가 그 건물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으니 인생은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계속 묶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을이면 온통 황금빛으로 변하던 연백평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내가 태어나고 9살 때까지 학교를 다녔던 유년기의 고향은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북한의 황해도이다. 그때는 그냥 황해도라고 불렀는데, 요즘 북한관련 책을 보면 내 고향 평산이 황해북도에 소속이 되어 있다. 황해도 평산은 서울에서 신의주로 가는 경의선이 개성을 지나 황해도를 관통하고, 평안남도를 거쳐 평양으로 가는 딱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말하자면 교통의 요지인 셈이다. 신의주로 향하는 경의선은 평산에 와서 두 갈래로 갈리게 되는데 경의선을 타고 곧장 평양을 지나 위로 가면 신의주로 가게 되고, 평산에서 기차를 내려 오른쪽 철길로 갈아타면 그 철길은 경원선이 되어 원산 해수욕장으로 가게 되는데, 그 기차를 계속 타고 가면 한반도의 북동쪽 끝인 두만강까지 가게 돼있다.
평산은 드넓은 황해평야를 온 가슴으로 끌어안고 있어서 일제시대에는 일본사람들이 황해도 들판에서 수확되는 기름진 황해도 쌀을 모두 수탈하여 평산역에 쌓아 두었다가 기차로 사리원을 거쳐 평양, 그리고 신의주를 지나 쌀이 나지 않던 북만주 일대로 실어 날라 관동군의 군량미로 조달하기도 하였고, 남쪽 서울 쪽으로 보내게 되면 인천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가져가기도 하였다. 우리 때에는 연백평야라고 불렀던 그 황해도 들판은 참으로 비옥하여 가을이면 들판이 온통 황금빛으로 변하고 봄이면 보리밭의 향기가 배고픈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 주던 그런 곳이었다. 평산에서는 바닷가 해주 쪽으로 달리는 협궤철도도 놓여 있어서 일제시대에는 학생들이 그 협궤열차를 타고 해주나 장연지방의 풍광을 찾아 수학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황해도의 종산(宗山 : 산 중에 조상벌이 되는 명산)으로는 구월산(해발 954m), 수양산(해발 946m), 멸악산(해발 818m) 등이 있다. 황해도의 비옥한 들판을 가로지르며 온갖 곡식들을 키워내는 모든 강이나 개울의 근원지는 이 세 산에서 발원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 고향 평산에서 제일 가까운 종산은 멸악산이다. 나는 그곳에서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멸악산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황해도에서 중학교 이상을 다닌 사람들은 가을 수학여행을 가는 곳으로 멸악산을 쳐 준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평산에서 가장 유명했던 곳은 온정리라는 곳에 있던 평산온천이었다. 평산온천의 수질은 한반도 최고의 것이라고 하였고, 그곳의 물 온도는 사계절 섭씨 15도를 유지하여 평산온천에는 일본식 목조건물이 많이 서 있었고 요리집도 많았다. 기억이 아련하지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몇 번인가 가봤던 그 온천장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평산 읍내에서 달려 온 인력거로 길이 꽉 막혀 있었다.
평산출신의 유명 인사로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을 들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안골인데 내 고향은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이다. 같은 평산군에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면과 면 사이이기 때문에 그리 멀지도 않다. 고향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독립지사인 김구 선생도 같은 황해도 출신이며 그분의 고향은 해주이기 때문에 평산에서 기차를 타면 한 나절에 가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분들의 고향이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황해도이고, 같은 황해도 안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니 나로서는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공출 피해 쌀 숨기던 모습 어렴풋해
내가 태어난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는 초가집이 옹기종기 30여 가구 정도가 어깨를 맞대고 있던 정다운 농촌이었다. 내가 소학교에 들어갔던 1930년대 말은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던 때였기 때문에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농촌지역에서 식량을 빼앗아가던 공출이 심했던 때였다. 그래서 농민들은 쌀을 한 톨이라도 지키기 위해 집안 곳곳을 파고 곡식을 숨겨 놓던 그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할 수가 있다.
8살 때 아버지가 세운 한포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아침이면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여 상급생의 인솔 하에 학교로 향하였다. 워낙 철이 없을 때니까 상급생들이 재촉을 하는데도 십리가 넘는 등굣길을 가다가 개울이 나오면 그 개울에 엎드려 세수도 하고 모래로 양치질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치약이 없을 때니까 소금으로 양치질을 하는데 소금도 귀해서 개울가의 모래로 이를 닦으며 개구쟁이들끼리 히히덕거리던 것이 눈에 선하다. 학교 가는 길에 뽕나무밭이 있으면 주인 몰래 오디를 따 먹는 맛이 그렇게 좋았고 여름이면 개울에서 모래무지를 잡아 구워먹던 생각도 난다. 시골에서는 도시 아이들처럼 양복을 입고 다니지도 않았고 너나없이 바지저고리를 입었는데 바지의 허리끈이 늘어져 바지가 줄줄 내려가 서로 손가락질하며 웃기도 하였고 겨울에는 해어진 솜바지 사이로 칼끝 같은 바람이 스며들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향에서 어머니는 과수댁으로 홀로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힘들게 키웠는데 세 살 아래인 여동생이 감기 몸살로 앓아눕다가 황망하게도 그대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어머니의 슬픔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그해에 어머니는 농토를 소작인들에게 내어주고 우리 형제들을 이끌고 서울로 오셨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잃고 난 뒤 더 이상 고향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서울 올 때 동구 밖까지 나와 목 놓아 울던 친구들
고향 필대리에서 해주읍으로 나와 기차를 탔는데 이삿짐을 목탄차에 싣고 고향을 떠날 때 친구들이 모두 검은 고무신 차림으로 동구 밖에까지 배웅을 해 주었고 트럭이 고향을 떠나올 때 나는 목 놓아 울었다. 고향 친구들은 우리 집 이삿짐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동구 밖에 서 있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연백평야와 누렇게 황금물결을 이루며 흔들리던 벼이랑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농촌 친구들은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꼭 형제들처럼 다정했고 이웃집에 들어갈 때는 무조건 아저씨, 아주머니를 부르면서 천연덕스럽게 마루 위에 걸터앉고 그렇게 앉으면 이웃집 아주머니들은 감자와 고구마를 슬그머니 내주셨다.
9살 때 떠났던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의 들판과 그 냇가의 물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다. 몇 년 전 내가 관여했던 <SBS> 방송사에서 북한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그곳 임원들이 함께 가자고하였다. 나는 내 고향 황해도, 평산군을 들를 수 있냐고 되물었다. 평양과 묘향산만 간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고향을 자유롭게 찾을 수 있을 때 가지요.”
영화예술의 미래 이끌 인재를 생각하며
영화배우 신영균은 1928년 11월 6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에서 신태현 씨와 신순옥 여사의 차남으로 출생. 평산에서 살던 어린 시절 부친이 별세하자 자녀의 장래를 걱정한 모친의 노력으로 가족이 서울로 이주해 동대문에 있는 홍인초등학교를 다녔다. 이어 한성중·고교 졸업 후 극단 ‘청춘극장’에 입단, 일찍이 신극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며 서울대 치과대 진학 후에는 서울대 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 직접 무대에 오르는 등 연극부장으로 공연활동에 깊이 빠져들었다.
6·25직후 학업을 끝내고 해군 군의관 복무 후 잠시 치과의사로 활동한 시기가 있으나, 1960년 조긍하 감독의 <과부>로 영화배우 활동을 시작하면서 1970년대까지 한국영화 전성기를 이끈 톱스타의 정점에서 20년간 <연산군>, <상록수>, <빨간마후라>, <5인의 해병>, <저 하늘에도 슬픔이>, <미워도 다시 한번> 등 294편의 작품을 남겼다. 대종상과 당시 대표적인 국제영화상인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고루 수상하며 사극과 현대물을 가리지 않고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남자다운 매력의 연기자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1968년부터 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이어서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예술인의료보험조합을 결성, 사회단체의 의료 복지운동 부문에서 선례를 열기도 했다. 예총회장을 세 번에 걸쳐 연임하면서 회관 건립의 숙원을 풀게 했으며 제15대와 1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여야 의원 62명으로 구성된 국회문화예술회를 결성, 회장을 맡아 문화예술계의 지원과 발전을 위한 운동과 입법 활동에 앞장섰다.
신영균 선생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일찍이 서울의 대표적인 개봉 영화관 중 하나인 명보극장을 운영하면서 1981년에 재단법인 신영예술문화재단을 창립, 장학사업과 단편청소년영화제를 통한 영화인재 발굴, 영화단체 행사지원 등의 기여사업을 해왔고 1999년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설립과 운영, 서울방송 계열의 SBS프로덕션, 제주방송 등 예술문화와 미디어산업의 경영 발전에도 열정을 바쳤다.
작가 김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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