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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육, 공존의 패러다임으로! | 폭력과 갈등, 북아일랜드 비극의 분단사 2015년 7월호

통일교육, 공존의 패러다임으로! 2

폭력과 갈등, 북아일랜드 비극의 분단사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경찰과 구교 민족주의자들의 충돌이 벌어진 지난 2011년 7월 12일(현지시각) 거리에 주차된 차량이 불타고 있다. 구교도에 싸워 이긴 17세기 보인전투를 기념하 는 신교도들의 축제에 구교도 젊은이 들이 난입하면서 경찰과의 충돌이 벌어 졌다. 경찰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젊 은이들을 플라스틱총과 물대포를 쏘며 진압했다. ⓒ연합뉴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경찰과 구교 민족주의자들의 충돌이 벌어진 지난 2011년 7월 12일(현지시각) 거리에 주차된 차량이 불타고 있다. 구교도에 싸워 이긴 17세기 보인전투를 기념하 는 신교도들의 축제에 구교도 젊은이 들이 난입하면서 경찰과의 충돌이 벌어 졌다. 경찰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젊 은이들을 플라스틱총과 물대포를 쏘며 진압했다. ⓒ연합뉴스

 

지구상의 분단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서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아픔을 겪고 내전에 휘말리면서 오늘까지도 분단체제로 살아가는 사회가 있다. 바로 북아일랜드다. 우리는 일제식민지로 36년을 지배당했지만 아일랜드는 나라 전체가 300년 이상 영국의 식민지로 수탈당하는 긴 고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식민지 아래서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항영 진영이 영국과의 관계 설정을 놓고 분열하면서 북아일랜드의 비극은 시작한다. 물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분단의 책임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 없이 연합왕정의 분할지배를 지속하려는 영국에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우리의 3·1운동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도 독립 자치정부를 요구했다. 하지만 전승국에게는 민족자결 원칙이 해당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가 일부 영국 식민지 국가들에게 영국 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하고 영연방 자치국가로 남게 한다는 안을 제시하며 조정하는 과정에서 아일랜드 문제를 놓고 밀약이 오갔다. 결국 아일랜드 자치령에 아일랜드의 북쪽 얼스터 지역 5개 카운티(오늘날의 북아일랜드)는 제외한다는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공화파와 얼스터 지역은 영국의 일부로 남는다는 연합파 사이의 갈등은 결국 영국-아일랜드 전쟁(Anglo-Irish War, 1919~1921)으로 귀결되었다.

갈등 뿌리엔 영국 식민지기 민족차별 전략 있어

여기서 독립을 목전에 둔 아일랜드가 왜 영국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는가 하는 점이 궁금해지는데, 결론적으로 이 전쟁은 300여 년간의 식민지화가 낳은 민족차별 전략의 끔찍한 투사이고 이후 북아일랜드의 비극을 알리는 전조였다.

16세기 중엽 헨리 8세의 영국성공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지형 재편 전략에 따라 이후 영국 왕들은 영국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을 아일랜드로 이주시켜 식민사업 추진과 함께 반가톨릭·앵글리칸 종교의 확산에 경주하였다. 특히 스코틀랜드인 장로교도들이 주로 이주한 얼스터 지역에서 경작지 소유권을 영국인과 스코틀랜드인으로 제한한 불평등한

『페날법(Penal Law)』은 가톨릭에 근간한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촉발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얼스터 지역은 식민화 과정에서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지배계급 구조를 와해시키고 신교도 중심으로 물적 토대를 구축한 친영 연합주의자와 아일랜드공화국의 완전 독립을 갈구하는 구교 기반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 분열되었다.

3년간에 걸친 영국-아일랜드 전쟁에서 아일랜드공화군은 약 2,500여 명의 사망자를 낳은 채 격파되고, 종국적으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얼스터의 6개 카운티는 북아일랜드로서 영국의 일부로 남고 남아일랜드 자유국가에는 자치를 허용하는 것으로 전쟁은 끝났다. 1949년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공화국은 자유국가로 완전독립하고, 아일랜드공화국과 국경이 그어진 북아일랜드에서는 공화주의자와 연합주의자 민병대 간의 내전이 일상의 삶을 위협하는 분쟁기(1968~1998)로 이어진다.

분단 이후 정치적 권리가 제한된 상태에서 완전 독립의 상징인 ‘아일랜드공화국으로의 통일’을 꿈꾸는 가톨릭·민족주의 진영은 1967년 북아일랜드시민권리연합회(NICRA)를 결성하였다. 1968년 10월 5일 런던데리에서 NICRA가 주관한 평화적 시민집회에 대한 영국군의 무력진압이 전 세계 뉴스로 폭로되면서 북아일랜드는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분쟁지가 되었다. 이후 연일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영국 경찰이 2천여 명이 넘는 공화주의자를 구금하자 런던데리에서 1972년 1월 30일 반구금 시위를 벌였는데 이 때 영국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13명이 즉사한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다. 1972년 한해에 영국 경찰과 군대를 포함하여 양측 민병대 쪽에서 총 467명이 사망하였다. 이후 양쪽 진영의 정치가뿐만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을 겨냥한 폭격이 연일 이어졌다.

이에 영국 대처 정부가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구금된 공화주의자들을 특별관리하여 범죄집단화하자 이에 항의하는 옥중 단식투쟁이 1981년 3월 1일 시작되어 10월 3일까지 이어졌고, 1차 단식자 10명이 사망하였다. 이 때 신펜당의 후보로 출마하여 옥중 당선된 보비 샌즈(Bobby Sands)가 결국 사망하자 정치투쟁의 출구를 대안 정당으로 모으려는 노력이 일었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인 신펜당의 입지를 넓혀주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실제로 신펜당은 1998년 평화협정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분쟁기(1968~1998) 북아일랜드 사상자 10만명 넘어

분쟁기 동안에 북아일랜드 내의 피해규모를 보면 사상자만도 10만명을 넘는다. 1968년부터 1998년까지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가 3,466명으로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37명이나 있고 여성도 321명에 달한다. 1969년 이래 2007년까지 영국군은 총 30만명이 주둔했으며 영국군도 505명이나 사망했고 3만여 명이 부상당했다. 현재 북아일랜드 인구가 120만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가구당 10명 중 1명꼴로 피해를 입고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실업률은 거의 80%에 육박했고 젊은이들은 다 떠났다.

최악의 분쟁기에 폭력은 응징을 낳고 응징은 또 다른 응징을 낳아 결국 폭력의 악순환을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를 놓고 북아일랜드 사회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피해자 가족들이 나서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낳는 폭력을 종식시키자고 호소하며 폭력을 중지하고 평화와 화해로 가는 지름길을 찾자는 평화동맹, 기독교인들이 고민하여 만든 평화와 화해의 공동체 코리밀라(Corrymeela), 정치적 차원의 평화협상 등은 고통스런 북아일랜드의 역사를 희망과 평화의 역사로 바꾸려는 노력들이다. 죽음의 문화에 빠지게 하는 분단구조를 박차고 살림의 문화를 향한 이러한 평화운동에 북아일랜드가 환호하고 있다.

 

 

강순원 / 한신대 심리아동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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