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7월 2일

명사의 고향을 가다 | 무반의 명문가,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진 비밀? 2015년 7월호

명사의 고향을 가다 |  박용옥 前 국방부 차관

무반의 명문가,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진 비밀?

 ITV_201507_24

서울에서도 ‘봉피양냉면’을 파는 곳이 있다. 봉피양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러나 여름철이면 봉피양냉면을 파는 가게에는 앉을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봉피양은 ‘본평양’이라는 말이다. 평양 중에서도 중심지를 가리키는 말이 본평양이다. 일제강점기 때 평양 사람들은 서울에 지지 않으려고 평양 중심지를 가로지르는 거리를 서울과 똑같이 종로통이라고 하였고, 그 종로통에는 서울에 있는 본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박흥식의 화신백화점도 서있었다.

평양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소년 박용옥은 그 평양 종로통의 뒷골목에 있던 종로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종로국민학교는 해방 후 제3인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어도 학교 분위기는 일제강점기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장들은 완장 대신 팔뚝에 상사계급장 같은 요란한 표지를 하고 다니고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은 일요일이면 큰 제한 없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볼 수 있었다. 유년주일학교도 있었고 학생부도 있었다.

박용옥 소년의 어머니 김정태 권사는 종로통에서 가까운 장대재 교회를 다니셨다. 어머니는 꼭 새벽기도를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큰아들 용원과 작은아들 용옥을 데리고 가셨다. 한참 잠이 많은 소년기였지만 이상하게도 형제는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 나가는 일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아예 동네 친구들도 깨워서 함께 다녔다. 그 친구 중에는 장성조라는 친구가 있었다. 용옥 소년은 성조네 집 앞에서 매일 새벽 큰소리로 불렀다.

유년시절 행복했던 평양의 기억

“성조야~! 교회 가자!” 용케도 성조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바로 웃으며 뛰어나왔다. 그 장대재 교회는 한국 기독교사에도 나오는 평양 제일의 장대현 교회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던 해에 박용옥 소년은 제3인민학교의 3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세 살 위인 용원이 형은 5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여동생인 용숙이는 두 오라버니가 가방을 들고 나서면 자신도 학교를 가겠다고 떼를 썼다.

6·25가 있기 한 해 전이었던가. 가을에 모란봉 쪽으로 소풍을 갔는데 수풀 속에서 갑자기 위장을 한 인민군들이 총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다. 그 북쪽 군인들은 무슨 심산이었던지 눈에 불을 켜고 실전처럼 요란하게 훈련을 하였다. 그 무렵 대동강 건너 선교리에서 엄청난 규모의 산업박람회가 있었는데 무시무시하게 큰 대형 트럭에 탱크가 실려 끝도 없이 밀려다니는 것을 보며 무슨 사단이 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아니나 다를까, 1950년 6월에 전쟁이 터지고 평양에 미군 폭격기들이 날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해 가을 평양에 국군과 미군이 들어오고 전쟁은 곧 끝날 것만 같았다. ‘이제는 통일이 되어 서울 구경을 원도 한도 없이 하겠구나.’ 모두 꿈에 젖어 있었고 ‘꽃피는 내년 봄에는 그렇게 소문으로만 듣던 서울의 남산과 한강도 구경을 해보자.’고 평양 사람들은 신이 나서 김장도 담그고, 폭격으로 부서진 평양 거리를 재건하면서 석탄을 사들이며, 월동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 평양 거리가 흉흉해지면서 평양 사람들은 서둘러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장사를 하던 아버지 박춘화 옹은 하루아침에 사업을 접고 떠날 수 없다고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대동강의 인도교가 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방문이 열리면서 군복을 입은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매부! 누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요. 어서 일어나시라요!”, “아니 이게 누구가? 해방되며 남쪽으로 내려갔던 처남이 아니가?” 계급 없는 군복을 입고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4년 전에 서울로 내려갔던 외삼촌이었다. 20대 초반의 패기 넘치는 외삼촌 김순철이 다시 소리쳤다. “어서 빨리 입을 옷하고 이불 한 채만 들고 나오시라요. 내래 대동강 남쪽에 트럭 한 대를 가지고 왔수다래.”

외삼촌의 서슬에 모두 놀라 짐을 꾸리고 나서는데 이웃집 아주머니는 몹시 부러운 눈으로 박용옥 소년 일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하였다. “아이고, 우리 집에도 저렇게 길을 안내해 줄 삼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우리는 남쪽에 아무 연고도 없으니 어찌하노.”

정신없이 대동강으로 나와 부서진 다리를 타고 곡예를 하듯 간신히 강 남쪽에 내려섰을 때 거짓말처럼 군용 트럭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용옥 소년 일가가 모두 타고 자리가 남자 피난민 노약자들이 태워주기를 간청하였다. 어머니는 서둘러 노인과 부인을 태웠다. 트럭이 속력을 낼 때 어머니 김정태 권사는 큰소리로 기도를 하였다. “주님! 감사합네다. 이 무슨 기적이외까. 4년 전에 바람결처럼 떠났던 동생 순철이가 트럭을 몰고 와 우리 일가를 이렇게 안전하게 남쪽으로 가게 해주시다니요.” 박용옥 소년은 공산치하에서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나가셨던 어머니의 그 깊은 믿음 덕분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일단 서울에 내려왔지만 서울도 안전하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서울에 눈이 쌓일 때 서울 사람들은 지난해 여름에 한강 다리가 끊어지고 피난 못 간 사람들이 공산치하에서 고생한 생각을 하면서 모두 한강을 넘었다. 그 유명한 1·4후퇴였다. 박용옥 소년 일가도 뚜껑 없는 화물차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가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생활력이 강한 서북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전쟁 상황에서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

용옥 형제는 모두 공부에 자신이 있었다. 아니, 타고난 수재 가족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형 박용원도 대한민국 최고의 학교 경기중학에 들어갔고 용옥 소년도 얼마 안 있어 형의 뒤를 이어 경기중학에 들어갔다. 손아래 여동생 용숙이도 경기여중에 힘들이지 않고 진학하였다. 이웃사람들은 모두 수군댔다. “평양에서 피난 내려온 저 집은 조상의 묘를 어디다 썼기에 삼남매가 모두 경기를 들어갔단 말인가!”

지난 1992년 8월 남북고위급(총리)회담 군사분과위원회 회담을 마치고 북측 김영철 위원장 (현 북한군 정찰총국장)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좌) 2010년 이북5도위원장 겸 평안남도지사 시절(우)

지난 1992년 8월 남북고위급(총리)회담 군사분과위원회 회담을 마치고 북측 김영철 위원장(현 북한군 정찰총국장)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좌) 2010년 이북5도위원장 겸 평안남도지사 시절(우)

“저 집은 조상의 묘를 어디다 썼기에 삼남매가…”

형과 나란히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서울고등학교에서 명교장으로 이름이 나 있던 김원규 교장이 새로 전근을 해오셨다. 김원규 교장선생은 아침 조회 때마다 국가관을 강조하였다. “경기에 다니는 여러분이 수재라는 것은 천하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머리가 좋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좋은 머리로 많이 공부해서 자기 자신만을 위하고 국가와 민족을 외면하면 과거 일제강점기에 머리 좋은 청년들이 제국대학을 나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저만 출세하고 제 집안만을 위하고 민족과 나라를 저버린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여러분은 열심히 공부하되 국가와 민족을 위해야 한다. 전쟁이 끝난 지금은 국가 재건 사업에 앞장을 서야 한다. 따라서 성적이 좋은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이과로 진학하여 국가 재건 사업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몸이 튼튼한 사람들은 사관학교로 진학하여 그동안 전쟁을 하느라 손실을 많이 입은 장교들을 충원하고 이다음에 장군이 되어야 한다.”

김원규 교장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그때에는 경기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사관학교에 많이 들어갔다. 형 박용원은 육사 18기생이 되었고 용옥 소년은 21기생이 되었다. 형 박용원은 대령이 된 후 전역하여 다른 분야로 진출했지만, 박용옥은 국방부 군비통제관과 주미대사관 무관을 거쳐 장군이 된 후 국방정책실장을 맡았다. 그리고 1992년 2월에는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남북고위급회담에 정원식 국무총리가 참석할 때 남측 군사대표로 수행하였다. 그때 막 포장이 끝난 북의 고속도로를 통해 평양으로 들어갈 때 박용옥 준장은 벅찬 감회를 누르기 어려웠다.

‘40여 년 전 부서진 대동강 다리를 간신히 넘던 아홉 살짜리 소년이 장군이 되어 내 고향 평양으로 돌아오다니….’

‘아홉 살짜리 소년이 장군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다니….’

일행을 태운 북측 세단이 빠른 속도로 평양 시내를 가로지를 때 박용옥 준장은 어머니와 함께 새벽기도를 나가던 종로거리를 찾고 십자가가 달려 있던 장대현 교회를 눈으로 더듬었다.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평양의 종로거리는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 그리고 친구 성조와 성경을 끼고 달려가던 장대현 교회는 찾을 길이 없었다. 장대현 교회가 있었음직한 언덕과 평양신학교 자리가 어깨를 맞대고 있던 그곳에 놀랍게도 어마어마하게 큰 김일성 동상이 햇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회담장에 들어설 때 황해도 재령 출신인 정원식 총리도 감회가 깊은 듯 박용옥 장군에게 말했다.

“박 장군, 박 장군은 바로 평양 출신이지? 몇 년 만이야?” 박용옥 장군이 대답하였다. “네. 1·4후퇴 때 내려왔으니까 40년이 넘었습니다.” 정원식 총리가 다시 말했다. “난 1946년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니까 꼭 46년 만에 북한 땅에 온 거야.”

그때 북의 군사 대표로 나왔던 김영철 장군이 끼어들었다. 북한군의 대장 계급(지난 4월 국정원 발표에 의하면 현재는 상장으로 강등)까지 올랐던, 우리 남쪽에 가장 큰 위협을 주고 있는 정찰총국장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두 분이 우리 북조선 출신이십니까? 가만히 들어 보니 박용옥 준장은 평양 출신인 모양인데…. 정말 감회가 깊겠수다래.”

당시 별 하나로 남쪽 계급으로 치자면 김영철도 준장일 터인데 북쪽에서는 별 하나를 소장으로 부르기 때문에 그는 공연히 높은 체를 하며 박용옥 장군을 부를 때에는 장군이라는 말 대신 ‘준장’이라는 칭호를 힘주어 말했다. 어쨌든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회담 끝날에는 김일성 주석까지 만날 수 있었다. 김일성 주석도 남쪽 대표단의 고향을 보고 받은 듯 정원식 총리가 황해도 출신이고 박용옥 장군이 평양 출신이라는 것을 슬쩍 흘리면서 어서 빨리 남북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그럴 듯한 수사를 늘어놓았다.

어쨌든 6·25가 나던 1950년에 초등학교 3학년생이었던 박용옥 소년은 남쪽으로 내려가 소식조차 모르고 지내던 외삼촌이 뜬금없이 나타나 자신의 일가족을 편안하게 트럭에 태워 남쪽으로 데리고 내려온 사실을 두고두고 천착하고 있다. ‘도대체 그 낯도 모르던 외삼촌은 그 전란 중에 어떻게 트럭을 구했으며 그리고 4년 전에 거처도 모르게 헤어졌던 누님네 일가를 그 넓은 평양 시내에서 어떻게 찾아내고 감쪽같이 남쪽으로 무사히 데리고 내려왔을까.’

박용옥 장군은 경기고등학교에 다닐 때 단체로 가서 보았던 미국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생각하고 그 영화에 나오는 레트 버틀러 역의 클라크 케이블을 떠올렸다. 남북전쟁 속에서도 불사조처럼 전쟁터를 누비며 불타는 애틀랜타 시내에서 비비안 리를 마차에 태우고 유유히 빠져나오던 그 멋쟁이 사나이…. 한국전이라는 그 엄청난 전화 속에서 정체 모를 군복을 입고 트럭까지 몰고 나타났던 그 외삼촌은 지금 88세가 되었고, 삼성 장군 출신이며 국방 차관까지 지냈던 조카 박용옥이 찾아가면 지금도 기개를 잃지 않고 사나이다운 충언을 던진다. “박 차관이 잘 알고 있겠지만 공산당하고는 말이 안 되는 거야. 걔네들하고 말로 해서 이길 생각은 애당초 하지를 말아야 해. 그놈들에게는 그냥 주먹이 약이고 실력이 해결책인 게야.”

평양 출신 박용옥 장군의 일가는 가히 무반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다. 형 박용원이 육사를 나와 당당히 대령으로 예편을 하였고, 차남 박용옥은 육군 중장까지 진급을 하였으며 이 나라 국방을 책임지는 국방 차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여동생 박용숙의 낭군, 즉 박용옥 장군의 매제 이준

(李俊) 장군은 육사 19기로 사성 장군 출신이며 이 나라 국방을 책임졌던 국방 장관이었다. 한 집안에 이렇게 대한민국 국방을 책임지는 장차관과 대령이 존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진 비밀은 공산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새벽마다 장대현 교회에 나가 기도를 했던 그 어머니의 기도 공력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작가 김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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