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육, 공존의 패러다임으로! | 평화에 의한 평화를! EMU의 탄생 2015년 8월호
통일교육, 공존의 패러다임으로! 3
평화에 의한 평화를! EMU의 탄생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국과 일본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영국과 아일랜드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이웃국가다. 실제로 영국은 300여 년이 넘는 식민지화 과정에서 자국으로부터 이주시킨 영국인들로 하여금 엄청난 식민 사업을 진척시켜 오늘의 북아일랜드 도시기반을 다졌다. 벨파스트 시청을 가면 도시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버려졌던 북쪽의 허허벌판이 영국 이주민들에 의해 어떻게 오늘의 도시로 구축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것만 보면 북아일랜드 도시의 역사 만들기에 구교도 측 아일랜드인이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 이러한 역사적 인식 위에서 영국계 신교도가 다수인 북아일랜드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희망에 따라 독립이 아닌 영국의 일부로 남기로 결정한다는 주민투표가 식민지 종결 시점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식민지화 자체가 불의이니 이 땅에서 나가야 한다.”는 구교계 아일랜드 공화주의자의 입장과 “명백히 북아일랜드는 영국에서 이주해 온 우리 선조들에 의해 개발된 우리 영토이니 여기서 계속 살 권리가 있다.”는 신교계 영국연합주의자의 입장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되면서 문제해결을 위한 군사적 폭력이 난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피해는 한 주민의 말대로 ‘우리는 1921년 이래 지금까지 전쟁 중이다’로 압축된다.
오늘도 북아일랜드에 가면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국기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자기 집에 내건 국기는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 즉 소속감의 표현이다. 국기로 드러낸 거주지 간의 단절로 인한 상호 무지는 사회적 폭력에 대한 적대화상을 조장하기에 손쉽다. 자기 집단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는 전부 다 상대방 짓이다. 예를 들어 벨파스트의 경우 동벨파스트는 주로 신교 거주지이고, 서벨파스트는 구교도 지역이며, 남벨파스트는 혼합 지역이지만 중산층 지역으로 신교도가 압도적으로 많고, 북벨파스트는 혼합이지만 가난한 지역이다.
폭력의 악순환 … 어떻게 끊을 것인가
이렇게 거주지 간의 단절은 학교의 단절을 낳고 문화적, 사회경제적 이질감을 조성하여 북아일랜드에 살지만 서로 다른 문화적 코드를 사용하기에 조장된 폭력에 쉽게 굴복하게 된다. 따라서 적대자상(像)에 의해 이미지화된 폭력은 곧바로 응징을 낳고 이것은 또 보복을 낳게 되어 그 피해가 간혹은 길가의 어린이나 쇼핑하던 시민의 사망으로까지 가게 만들었다. 이렇듯 민간 피해가 커지면서 북아일랜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힘(폭력)에 의한 문제해결 방식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모두가 자책하며 폭력의 악순환을 어디서,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를 놓고 북아일랜드 사회는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모두가 분단체제에 길들여져 군사적 대응에 휩싸여 있을 때 응보적 관점이 아닌 평화적 관점으로 방향을 전환시킨 직접적 계기가 바로 1976년 평화운동단체인 피스 피플(Peace People,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움직임이었다. 1976년 8월 10일 동료 두 명이 무기를 이송하던 중 영국 경찰에 적발되어 사살 당하자 분노한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요원 레논이 차량을 질주하여 앤 맥과이어 자녀 세 명을 치어 죽게 만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현장에 있던 시민 베티 윌리엄스와 메어리드 코리건이 평화청원 릴레이를 주도하여 연일 3만5천명이 넘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시위로 이어졌다. 신·구교 여성들이 시작하던 평화 운동은 점차 지역사회 시민들의 상호이해교육(Education for Mutual Understanding, EMU) 활동으로 이어져 평화에 의한 평화(peace by peace)를 이루자는 재교육 운동으로 이어져 나갔다. 1976년 노벨평화상이 이들에게 수여되었고 평화에 의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평화교육은 이후 시민사회의 주요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서로 이해하기, 갈등극복의 시작
지역사회 간 분리주의가 편견을 심화시키고 증오범죄를 낳으며 사회적 통합을 저해하는 북아일랜드에서 지역사회 간 교류 및 상호이해는 절실히 요구되었다. 특히 학교 간 분리가 정치·사회적 분리를 반영하고 있고 그 뿌리에 종교적 분파주의가 깔려있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조성되는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지역사회 간 장벽을 해체해야만 했다. 이것이 분단극복을 위한 북아일랜드 평화교육의 주요방향으로 시민사회로부터 부각되었다.
무엇보다 종교적 영향력이 큰 북아일랜드 사회에서 종교적 분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 간 이해와 교류는 분명 장벽을 철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되었다. 1965년 벨파스트 퀸스 대학 교목인 레이 데이비는 평화와 화해를 위해 헌신하는 기독교 공동체인 코리밀라(Corrymeela)를 탄생시켰다, 코리밀라는 양극화된 북아일랜드 지역사회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자신들의 교회에 대해 우선적으로 비판하면서 북아일랜드 학교평화교육인 상호이해교육을 확산하는 데 주력하였다. 만남을 통한 상호이해교육은 북아일랜드의 문화적 정체성을 근간으로 지역과 학교가 함께 북아일랜드의 문제를 글로벌 맥락에서 심도 있게 이해하여 미래 전망을 함께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주도한 상호이해교육은 평화협정에서도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이루는 갈등해소교육으로 인정받았다. 북아일랜드 교육부도 상호이해교육을 범교과 주제로 적극 반영할 것을 권장하였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1998년 평화협정을 이끌기까지 북아일랜드의 평화교육은 분단극복을 위한 상호이해교육에 주력했다면 가시적 평화체제가 구축된 오늘날 평화교육은 상호이해교육보다는 평등, 다양성 그리고 상호의존성을 결합한 시민성교육에 주력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강순원 /
한신대 심리아동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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