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고향을 가다 | “통일이여, 어서 오라!” 2015년 9월호
명사의 고향을 가다 | 차인태 아나운서
“통일이여, 어서 오라!”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지금 나이가 40대 이상이라면 차인태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지난 1970년대와 80년대의 방송 아이콘이었다는 것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키가 훌쩍 크고, 코가 매부리 형으로 서양 사람처럼 생겼고, 인물이 훤한 아나운서였기 때문이다. 그냥 유명한 아나운서 정도가 아니었고 지금 ‘우리말 겨루기’와 ‘EBS 장학퀴즈’를 합쳐 놓았던 것 같은 <MBC> ‘장학퀴즈’를 20년 가까이 진행했던 아주 지적인 풍모의 아나운서였다. 또한 그는 그때 한창 공중파로 중계를 하던 ‘미스코리아선발대회’의 사회를 보기도 하였고, 1970년대 중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을 때 온 국민이 보는 장례 방송의 중계인이었다. 공교롭게도 몇 년 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를 하자 그 장례식 역시 그가 중계를 하였다. 결코 경망스럽지 않고 중저음에 정확한 서울말을 쓰는 표준 아나운서였기 때문에 그는 방송계를 대표하여 그런 국가행사를 치러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젠틀맨이며 옷에 먼지 하나 묻지 않을 것 같은 멋쟁이였다.
벽동 출신 소년, 대한민국 전설 아나운서로!
이런 멋쟁이 아나운서 차인태의 고향은 놀랍게도 한반도 지도의 북쪽 끝에 붙어 있다. 요즘은 북한 지도를 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드물겠지만 같은 북한 출신 사람들이라 해도 “평안북도 벽동”이라고 하면 “벽동이오?”하고 꼭 되묻는다. 이 벽동이라는 지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북한 지도를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평안북도라고 하면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줄기를 타고 뗏목이 흘러가는 장면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압록강의 줄기 밑에도 동쪽 절반은 자강도이고 서쪽 절반은 평안북도이다. 차인태의 고향 평안북도 벽동군은 지금도 평안북도 압록강변에 그대로 붙어 있다. 벽동하고 붙어 있는 도가 자강도이고, 벽동부터는 평안북도인 것이다. 그리고 벽동이라는 곳을 더 쉽게 알려면 초등학교 때에 배운 ‘압록강 수풍댐’이라는 지식을 동원해야 한다. 벽동은 바로 수풍댐이 있는 수풍호수를 끼고 있는 벽촌이기 때문이다. 6·25 때에는 미군 폭격기들이 북한에서 가장 전력 생산이 많았던 그 수풍댐을 폭격했기 때문에 벽동 주민들이 많이 다치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차인태는 다섯 살이 되던 해 겨울, 중공군들이 압록강을 건너 미군과 국군을 압박할 때 온 집안이 피난길에 올라 남하하였다. 차인태 소년의 집은 벽동 읍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지주 집안이었고, 증조할아버지가 평안북도 도의원이었으며, 압록강을 건너 무역도 하고 농사도 짓는 숙청 대상 1호였다. 그의 가족은 눈보라치는 1·4후퇴의 피난 물결에 휩쓸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차인태 소년의 집 역시 유명한 기독교의 집안이었기 때문에 피난 보따리 속에 성경책과 찬송가를 넣어가지고 황황히 남쪽으로 넘어왔다. 아버지는 융통성이 없는 군의관으로 전방에서 전방으로 옮겨 다녔기 때문에 차인태 소년은 평안도 사람들이 몽땅 모여서 예배를 보는 서울 영락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연세대 성악과에 진학했다. 대학 다닐 때에도 키 큰 미남에다가 중저음의 매혹적인 목소리를 자랑하는 바리톤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행사의 사회를 보기도 하고 독창으로 여학생들의 주목을 한 몸에 모았다. ROTC 장교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신앙심이 좋고 용모 단정한 여학생을 점찍어 남이 부러워하는 결혼을 했다. 사실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차인태라는 스타가 나타나면 모두가 자리를 비켜주고, 마이크를 건네주고, 그리고 그 밑에서 모두 눈빛을 빛내며 박수를 쳐 주었다. 교회에 가서는 성가대를 지휘하고, 대학생 때부터 이미 연세 방송의 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그런 출세가도에 단 하나의 거침도 없이 그대로 <MBC>에 스카우트되고 유명 아나운서가 되었다.
그는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늘 행동에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행여 누가 볼세라, 행여 누가 손가락질할세라, 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반듯하게만 살았다. 교회와 방송사, 명사들과의 교류와 유명인들과의 인터뷰, 그리고 사회봉사와 가정이 전부였다. 방송사에 나가면 프로그램이 몇 개씩 겹치는 바람에 몸조심을 해야 했고, 과로를 피해야 했다. 어쩌다가 뒤풀이를 하게 되더라도 교회 성가대의 솔로나 지휘를 위해 늘 목을 아껴야 했고, 뒷모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양해를 구하고 조용히 빠져나갔다.
방송 생활을 끝내고 나서도 쉴 새가 없었다. ROTC 동기생들이 동기 회장을 맡기더니 나중에는 그를 중앙회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교회에서는 늘 성가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여러 대학에서 방송 관련 학과장을 맡아 달라고 청을 하여 강의를 맡고, 또 다른 방송국에서 중요한 프로그램을 맡아 달라고 하여 정신없이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 동포들을 위한 방송에도 언제나 대한민국 간판 아나운서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다섯 살 때 고향을 떠나와 ‘평안북도 벽동’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북5도민에 관한 이런저런 행사를 맡게 하고, 끝내는 평안북도 지사직까지 맡게 되었다.
정년퇴임을 하고 한 5년 쯤 됐을 때였다. 환갑도 지났고, 오랫동안 내조해온 부인과 함께 해외여행을 다니며 이제는 좀 본격적으로 쉬어야겠다고 할 때 사단이 벌어졌다. 지난 2009년 10월 초하룻날 밤, 열이 갑자기 40도를 오르내리며 호흡 곤란 증세가 생겼다. ‘노년에 너무 일이 겹쳐 몸살이 났구나!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도 있는데 그 말이 딱 맞군. 이제는 좀 활동을 줄여야 할까보다.’ 뭐 이쯤 생각하면서 가까운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런데 의사들이 계속 들락거리며 검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끝도 없이 검사를 계속하더니 담당의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선언하였다.
‘하필 내게… 왜 이렇게 무거운 시련을 주시나’
“쉬운 말로 설명을 드린다면 심장과 폐 사이에 꽈리 모양의 암 세포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럼 수술해야죠.” 의사는 다시 한 번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들도 여러 번 토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위치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심장을 건드릴 수도 없고, 폐를 건드릴 수도 없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위치라 항암주사와 약물치료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장기적으로 진행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려 16개월의 암 병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암 환자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듯이 차인태 장로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였다. ‘아니, 왜 하필이면 나야? 암이라니…. 이 차인태가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렇게 무거운 시련을 주시나. 내가 정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야 한단 말인가?’
가끔씩 찾아오는 자식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아주고 기도를 한 후 망연히 앉았다가 갈 수밖에 없었다. 수호천사의 역할은 전적으로 부인 몫이었다. 천하의 차인태도 환자복을 입고 비틀거리며 화장실을 가야 하는 바로 그때에 제일 먼저 찾는 상대는 부인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괴로운 것은 1년이 넘도록 병상 밑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부인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저 사람은 무슨 죄가 있어 1년이 넘도록 침대 위에서 편한 잠을 자지 못할까. 사실 유명인 차인태의 부인으로 살아온 것도 일종의 스트레스였을 터인데 이제는 잠마저 제대로 못 자는 저 사람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보인다….’ 차인태 장로는 참으로 깊은 회한과 자괴감과 복잡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를 괴롭히는 그 병마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집으로 들어가 가까스로 정상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끔찍한 암 투병 과정을 생각하고 있을 때 <OBS> 방송사 측에서 명사들을 상대로 방담을 하는 프로그램 ‘명불허전’을 맡아달라고 하였다. 감사하며 수락하였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진행해 나갔다. ‘명불허전’에서 만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도 고비 고비 수없는 질곡을 건너고 이겼던 승리자들이었다. 그분들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으며 감사하였다. 그리고 인생의 깊은 뜻을 반추하였다.
2014년 6월 말이었다. 이번에는 전에 수술 받은 적이 있는 심장판막 부위에 이상 증세가 발견되었다. 3월에 시술 받은 판막 뒤쪽에 심한 세균감염 증세가 생겨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의사들은 토의를 한 끝에 차인태 장로를 보다 큰 병원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그래서 재수술에 들어가 12시간에 걸친 철야수술을 받아야 했다.
투병생활을 할 때 어느 교회에서 왔는지 젊은이들이 새벽시간에 찬송을 불러주었다. 먼 병동에서 찬송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던 차인태 장로는 그 낯모르는 청년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눈물을 철철 흘렸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참으로 약하고 또 약한 존재이다. 인간에게 생명을 준 그 조물주께서 코끝의 호흡을 거두어가는 순간 인간의 생존은 끝이 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부인이 써놓고 간 일기장을 훔쳐보게 되었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 차인태, 이제 그만 시험하시고 그의 낡은 죄 깨끗하게 하셔서 진정 그에게 주신 달란트를 주를 증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시옵소서. 나의 남편 차인태, 이제 그만 건강한 몸을 허락하셔서 주님 사랑의 증거가 되게 하소서. 최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 기쁘게 주님과 마주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아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에!
그 신앙심 깊은 부인의 덕이었을까. 차인태 장로는 이제 겨우 병마를 벗어나게 되었다. 사실 옛날 사람들이 ‘인생칠십고래희’라는 말을 쓴 것을 생각하면 이제 70세를 넘겼으니 생에 대해 커다란 애착을 가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 때인가. 인생 100세 시대니 뭐니 하면서 인생은 70부터라는 새로운 조어가 생겨날 정도이다. 따라서 건강을 회복한 차인태 장로는 나름대로의 새로운 기도를 시작하고 있다. 고향 벽동에 있는 드넓은 수풍호의 얼음 위에서 세계 최대의 쇼트트랙 경기장이나 자연빙질의 경기장을 만들어놓고 그 추운 압록강의 겨울을 즐기면서 동계올림픽을 한다면, 차인태 장로가 두꺼운 털 파커를 입고 중계방송을 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또 한때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에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세계인들이 모일 수 있다면 그 거창한 김일성 광장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하는 대신 복음화대회가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다. 고향을 두고 온 북한 출신 크리스찬들이 제일 앞줄에 앉고, 그리고 통일을 기원하는 남쪽의 기독교인들이 뒷줄에 앉고, 마지막으로는 전 세계에서 찾아온 크리스찬들이 그 광장을 가득 채운 후 세계 복음화대회를 할 때 사회를 보는 것이 차인태 장로의 꿈인 것이다. 차인태 장로는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 복음화대회의 사회를 보든지 아니면 자신이 젊을 때부터 함께했던 영락교회의 시온성가대를 지휘하면서 대규모 코러스를 선보이는 것이 또 하나의 꿈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통일이 시작되고 있다. 지뢰밭과 철조망으로 엄중하게 묶여 있는 DMZ가 있지만 북한의 병사들이 뜬금없이 넘어와 우리 아군의 초소를 두드리고 있다. 그리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물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꾸준히 도강귀순을 시도하여 이미 3만명에 달하는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온 것이다. 세상에 그 땅의 형편이 어떠했으면 강원도 양구 주민들의 숫자에 버금가는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두만강과 압록강의 물길을 타고 다시 수만 킬로미터의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고 동남아시아의 정글을 넘어 자유대한을 찾아오고 있다는 말인가. 주민 3만여 명이 가족단위로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한 체제, 그런 체제가 과연 얼마나 더 오래 유지될 것인지…. 굳이 전능하신 신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적어도 현재 지구상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은 한반도가 유일하다.
이런 일을 천착하며 깊이 기도하면서 차인태 장로는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 죽음의 언저리까지 내려가서 이제 다시 살아난 이유는 무엇일까…? 통일의 그날, 내 고향 벽동 아니면 평양 근처에서라도 통일을 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가기 위해 주님께서는 나를 살려 주셨을 것이다. 통일이여, 어서 오라!’
작가 김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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