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보기 2015년 1월 1일

세계분쟁 25시 |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벽, 북아일랜드 가로막다 2015년 1월호

세계분쟁 25시 9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벽, 북아일랜드 가로막다

영국은 스코틀랜드, 웨일즈,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등 4개의 주로 구성된 연방 국가이다. 특히 북아일랜드 지역은 근대 유럽 역사상 최대의 민족문제가 발생한 곳 중 하나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종교·민족·지역 간 대립, 식민지배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 사회경제적 격차 등이 얽히고설켜 복잡한 성격을 띤다. 1968년 유혈사태 이후 신·구교도 거주지역을 가르는 장벽이 세워졌다. 6개월간 한시적 용도로 세워진 벽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높아졌다. 벽면에는 서로를 향한 불신과 증오의 낙서가 새겨졌다. 최장 5㎞에 달하는 담장 99개는 한반도 비무장지대(DMZ)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벽’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3년 7월 14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신교도들이 경찰을 향해 가구 등을 던지며 공격에 나섰다. 시위대는 전날 오렌지데이 축제를 벌이며 구교도 지역으로 진입하려다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 11명이 체포됐으며 충돌과정에서 경찰도 30여 명이 다쳤다. ⓒ연합뉴스

2013년 7월 14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신교도들이 경찰을 향해 가구 등을 던지며 공격에 나섰다. 시위대는 전날 오렌지데이 축제를 벌이며 구교도 지역으로 진입하려다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 11명이 체포됐으며 충돌과정에서 경찰도 30여 명이 다쳤다. ⓒ연합뉴스

불신과 증오의 낙서, 갈수록 높아져 가는 담장

북아일랜드 문제의 발단은 로마 가톨릭과 결별을 고한 헨리 8세 시절 영국의 성공회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종교를 강요당한 켈트족 족장들과 아일랜드 귀족들은 크게 저항했고,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귀족 영지를 몰수하고 개신교도들을 이주시켰다. 이에 따라 아일랜드의 북부 얼스터 지방을 중심으로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17세기 중엽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자 아일랜드에서는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1649년 크롬웰이 이끄는 영국군이 아일랜드에 상륙해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일랜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1653년 마침내 아일랜드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후 영국은 전체 토지의 50% 이상을 몰수해 개신교 영국인들에게 분배했고, 다수의 아일랜드 사람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처지에 놓였다.

영국의 식민지배 기간 동안 기존 아일랜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극심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공직 진출도 허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개인 재산에 대한 제한도 가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곤란할 정도의 핍박을 받았다. 이때 대기근으로 약 30만명이 사망했고 영국의 폭압을 피해 아일랜드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로 피신했다. 기간 중 이곳을 빠져나간 사람들은 약 320만명으로 아일랜드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줄어든 수치였다.

1905년 신페인당이 창설되면서 조직적인 반영 자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강경한 투쟁 덕분에 1914년 아일랜드 자치 법안이 성립되었으나, 신교도가 다수인 북부 주민이 아일랜드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해 난항을 겪다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자치는 연기되었다.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자 신페인당은 1916년 더블린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독립정신을 각성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1919년 아일랜드 국민회의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할 수 없었던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에 군대를 파견함에 따라 양측은 약 3년간 전쟁을 치르게 된다. 1922년 전쟁이 종결되면서 양측에서 체결한 조약에 따라 북부 얼스터 6개 주는 영국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26개 주는 자치령으로 두는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을 놓고 아일랜드 민족운동 세력 간 내분이 발생해 10년 이상 내전과 아일랜드 분리·독립 세력의 대(對) 영국 테러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1937년 아일랜드 자유국은 헌법을 제정하고 국명을 ‘에이레’로 정해 독립을 선포했다. 1949년에는 국호를 ‘아일랜드’로 바꾸고 영국 연방에서 탈퇴하는 등 영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멈추지 않는 ‘피의 일요일’ … 평화는 언제쯤?

한편 북아일랜드에서 가톨릭계 주민을 정치·경제적으로 철저히 차별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계 주민과 신교계 주민 간의 무력 충돌이 일상화되었다. 1968년 가톨릭교도들이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참정권과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도중 유혈폭동이 발생해 9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다쳤다. 또한 1972년에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영국 공수부대의 일반 시민 시위대를 상대로 한 총격사건으로 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격렬한 무장투쟁이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1993년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는 ‘다우닝가 선언’을 통해 IRA 무장해제 및 북아일랜드 귀속 여부 주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논의했다. 이것을 계기로 1999년에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출범하고 2005년 IRA가 모든 무장투쟁을 포기할 것을 선언했다. 2007년에는 공동자치정부가 출범하는 등 거의 한 세기 가까이 이어지던 분쟁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 듯 했다. 그렇지만 2009년 영국군 병사 2명 살해사건과 경찰관 1명이 사망한 사건이 IRA에서 진화된 순아일랜드공화국군(RIRA)의 소행으로 알려지면서 분쟁해결에 찬물을 끼얹게 되었다. 40년 이상 지속된 신·구교도의 무력 충돌로 4천명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아일랜드의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201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IRA 유혈테러의 상징적 장소인 에니스킬렌을 공식 방문해 피로 얼룩진 과거사의 종식을 위한 첫걸음을 뗐다. 2013년에는 양측 증오의 상징과도 같았던 장벽을 허물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지혜를 모아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를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는 것은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조상현 / 군사연구소 연구위원



댓글 0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 해야 합니다.

좋아요 0